3화 이대로 끝낼 수 없어
나는 현관문을 쾅 닫지 못한다.
이웃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뭔가 끝장을 내는 그 느낌이 어릴 때부터 싫었다.
엄마를 화두로 화를 내던 할머니의 행동 중 하나가
대문이건 방문이건 쾅 닫는 것이었다.
그 쾅 소리를 감당해야 하는 나 따윈 아무런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서글픈 느낌..
그 쾅 소리는 내게 무력감과 상처를 주었다.
그 기억이 온몸 세포에 밴 나는 우리 집 현관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그 순간, 앞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 전완근의 그 남자..
살짝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저벅저벅 간다.
여자 친구는 있을까. 왠지 없으면 좋겠다.
딱 그 정도의 호감 어린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내겐 아무런 소용도 없는 타이밍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호감 관성의 법칙은 힘이 센 모양이다.
하필 눈치 없는 타이밍에 락스타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오, 전완근맨~"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거리였고, 앞집 남자도 슬쩍 돌아본 후 나갔다.
못살아...! 이 상황 어쩔 거야.
그노메 전완근 소릴 내가 전했다고 생각하려나 화끈 거린다.
"곧 죽어도 저 남자가 궁금한가 봐?"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요, 뭐."
"그러기엔 자기 귀, 너무 쫑긋인데? 저 남자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려줘? 아까 잠깐 마주쳤다 했잖아.
일시적으로 내가 나를 드러냈을 때."
"아뇨, 안 궁금합니다. 출근할게요."
"치킨 사 와. 전 회차 할배는 뼈 없는 거 시키더라."
락스타는 어떤 존재일까.
영화에서처럼 초능력을 쓰는 거 같긴 한데 어째 생활밀착형 저승사자 느낌.
어제의 공포를 박살 내는 노처녀 이모고모 바이브.
이걸 누가 믿겠냐고.
종이로 출력된 사직서를 내미는 내게 서대표가 말했다.
미간을 접으며 탐탁지 않은 저 표정으로 늘 나를 베어왔었지.
"어젠 내 전화 왜 씹었어?"
사직서를 더 깊이 그녀의 앞쪽으로 쭉~ 옮겼다.
"이율이 씨,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인수인계는 할 수 있게 해야지."
이기적이라고? 인수인게?
속으로 천불이 솟았지만 딱히 표 내지 않았다.
그저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하다고만 했다.
내가 어디가 아픈지, 어떤 상황인지, 가까운 미래에 어찌 될지
그녀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았고, 이게 이기적인 거라면 이기적이자 다짐했다.
생애 한 번쯤.
그럼에도 끊임없이 뭔가 뜨거운 것이 방망이질 쳐댔다.
난 왜 이 모양일까.
왜 시원하게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할까.
이제 당신의 속옷빨래는 직접 널라고.
그 집 강아지 병원 진료를 대신 가느라 밤샘작업을 했다고.
당신 가족 저녁을 왜 내가 차려주냐고.
당신 아들이 놓고 간 준비물 때문에 내 근무시간에 초등학교에 달려갔다고.
당신 딸 그림 숙제를 왜 내게 시켰냐고.
당신의 남편에게 덜미 잡힌 불륜남 아저씨를 왜 우리 막내 외삼촌으로 둔갑시켰냐고.
요즘 이런 회사가 어디 있냐고?
이런 직원이 어디 있냐고?
있었다. 분명히.
사무실 건물 꼭대기 층이 서대표의 집이라서 가능했던 구조였다.
크지 않은 디자인 회사인 데다 서대표 보다 나이 많은 남자 팀장에 그 밑에 직원은 나 하나.
그 허접한 일들은 늘 내 차지였다.
처음엔 물론 서대표의 정중한 부탁으로 시작됐다.
허나 한 달이 6개월 되고 1년, 3년이 되면서 서대표의 뻔뻔함은 극에 달했다.
서대표가 콧소리를 내며 "이율이 씨~"하고 호출하면 뻔했다.
그 집 관련 잔심부름.
디자이너로 일 한 시간보다 그녀를 수발든 시간이 더 많았달까.
돌이켜보면 처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킬 때 그 시작점에 경고를 하거나 사표를 던졌어야 했다.
말하지 않으면, 대응하지 않으면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결심했다.
락스타의 말처럼.
[속마음으로 따지면 전투력 괜찮은데?
괴롭히는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질러!!!!
설마 나보다 걔들이 더 무서워? 쫀심 상하게.]
"이봐요, 이 율이 씨...!!!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내 말 무시해?"
잠깐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는 서대표는 책상을 탕 치며 말했다.
"네."
기막혀 보는 서대표를 덤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순간 움찔하는 걸 보니 찔리는 구간이 있긴 있나 보다.
"네. 더는 못하겠습니다. 아뇨, 안 하겠습니다. 안 해요."
곱지 않게 목례하고 저벅저벅 사무실을 나오며 대표실 문을 쾅 닫았다.
그 쾅 소리에 서대표가 내지르는 야!!! 소리가 묻혔다.
뭔가 끝장을 내는 그 느낌은 버림받은 자의 몫이 아니었다.
금쪽같은 아들을 빼앗긴 내 할머니의 분노, 억울함의 표출처럼
내일이 없는 삶은 미미한 주파수일 망정 묘한 초능력이 생긴다.
서대표에게 할 말 70%도 못했지만 어딘가 후련했다.
평소의 극소심 이율이라면 당장 뽑히지도 않을 후임자 기다리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달렸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학원 가방을 든 서대표의 아들이 서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가방을 내민다.
들어달라는 것이다.
나는 대답 없이 엘리베이터에 타고는 꼬맹이에게 등을 보였다.
"가방."
고압적인 말투다. 기막혀.
"이제 니 일은 네가 해. 숙제도, 가방 드는 것도, 밥도."
"울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월급 주지 말라고."
어쩌다 저 집 패밀리 전체가 나의 상사가 되었을까.
4, 3, 2, 1-
층수가 바뀌고 나는 어깨 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의 무대응이 불쾌했는지 서대표주니어는 자기 엄마와 똑같은 톤, 똑같은 길이로 소리쳤다.
"야!!!!!!!!!!!"
나는 지엄한 표정으로 꼬맹이를 돌아봤다.
그 아이가 본 적 없는 단단한 눈빛으로-
그제야 시선을 내리는 꼬맹이에게 나는 무언의 미소를 전했다.
굿바이, 갑질 패밀리
굿바이, 무수리.
락스타가 말했던 뼈 없는 치킨을 사들고 오랜만의 가벼운 발걸음을 느꼈다.
골목을 걸어가는 앞집남자의 뒷모습에 다시금 조신하게 보폭을 줄였다.
앞집 남자는 편의점으로 들어갔고 나는 종종걸음으로 황급히 지나치려는데
금세 편의점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그가 날 보지 않았으면 했지만 코 앞에서 다시금 스쳤다.
그는 아침처럼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지나쳐갔다.
느릿느릿 그의 뒤를 밟으며 긴 골목을 걸었다.
1년을 못 채우겠지? 그 와의 눈인사...
갑자기 서글픔이 밀려왔다.
의사가 나를 측은하게 보지 않았다면,
락스타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달라졌을까.
회사에선 서대표에게 계속 시달렸을 테고
앞집남자와는 월세계약이 끝나도록 하릴없이 눈인사만 주고받았겠지.
뭐 하나 달라진 것 없었겠지.
"뭘 또 그리 아련하게 보나."
돌아보니 락스타다.
또 잊었다, 이계의 그녀에겐 초능력이 있다는 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릴없이 눈인사만 주고받으면 뭘 해. 킥이 있어야지."
"됐어요. 배터리에 10% 남았는데 나 어때요, 할까요? 노양심이지."
"무슨 소리야, 10%라니.."
그럼 20%...? 나는 희망의 필터가 씌워진 눈망울로 락스타를 바라보았다.
"1%."
아.. 절벽 끝에서 단 1%의 바위만 까치발로 디디고 있는 건가.
1%처럼 서글픈 절망은 없다.
"근데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하루하루 의미 없이 1%만 살아.
누가 알아? 하루 100%로 꽉 채워 살면 니 삶이 더 나을지?"
락스타는 뼈 없는 치킨 봉지를 낚아채듯 들고 들어가고
그녀의 말은 멍하니 비어버린 내 뇌리에서 공명했다.
배터리 1%의 여생-
그래 이대로 끝낼 순 없어.
나.. 달라질 거야.
나의 남은 시간은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아직 나는 살아있고, 끝까지 치열하게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