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행복찾기
“엄마, 엄마 진짜 예쁘다.”
중 1인 우리 아들은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았나 보다. 마흔 넘은 엄마가 예쁘단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똑 닮은 시선으로 엄마를 바라봤던 어릴 적 ‘내’가 떠올라 의심을 거두었다. 어릴 적 나는 우리 엄마가 참 예쁘고, 참 좋았다.
“엄마, 엄마 진짜 예쁘다.”
“내가 예쁘나?”
“어, 엄마, 고소영보다 더 예쁘다.”
엄마 얼굴을 유심히 보고 또 봐도 참 예뻤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도 큰 눈, 오뚝한 코.
그때의 엄마 얼굴을 기억하고, 엄마를 좋았했던 나를 기억한다.
내 눈엔 어쩜 엄마가 그렇게 예뻤을까? 어릴 적 나의 우주였던 우리 엄마의 찬가를 불러보려 한다.
우리 엄마는 호호호 웃지 않고, 깔깔깔 웃으셨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고개를 젖히고 손뼉을 치면서 웃으셨다. 엄지손가락을 겨드랑이 밑에 대고 메롱 하듯 괴상한 몸짓을 하고 웃으시면 딸들도 같이 배 아프게 웃었다.
“엄마, 무슨 일이 있어?” 우리 아이들이 한 번씩 걱정하듯 건네는 이 말에 나는 뜨끔 한다. 엄마가 넘었던 마흔 고개를 넘고 있는 나는, 엄마처럼 웃는 일이 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 엄마는 세 딸이 인정하는 ‘긍정 여왕’이었다. 웃을 일이 많았는가? 하면 단연코 No! 엄마는 녹록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내면서도 소소한 웃을 일을 놓치지 않으셨다. 일희일비의 ‘일희(一喜)’를 제대로 누리셨다. 아빠 가게 일을 도와드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중에도 우리 엄마는 딸이 한 우스운 말을 놓치지 않으셨다. ‘뭐라고 했다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웃어주셨다.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 살았고 엄마 아빠의 잦은 부부싸움 때문에 불안에 힘들었음에도 내가 그때의 우리 집을 밝게 기억하는 건 분명, 우리 엄마의 웃음 덕분이다.
우리 엄마는 윤형주, 김세원 같은 포크송 가수를 좋아했다. ‘음악=트로트’가 공식인 시골에서 우리 엄마의 음악 취향은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왠지 고상했다. 이모들 말로는 우리 엄마가 소싯적 기타 연주도 잘하셨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딸이 좋아하는 성시경 노래를 같이 불러주셨고, 아침마다 좀체 일어나지 않는 세 딸을 깨우려고 성시경 노래를 틀어주셨다. 물론 지금 우리 엄마는 임영웅의 빅 팬이다.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갑자기 눈물이 흘렀고 집에서는 정성 들여 필기한 공책에 빨간 줄을 죽죽 그어댔다. 문을 쾅 닫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호랑이 같은 아빠에게는 세상 착한 딸로 둔갑하면서 순한 엄마한테는 감정을 퍼붓듯 쏟아냈다. 그런데도 사춘기 시절 나는 엄마에게 혼난 기억이 없다. 맞붙을 불조차 없었기에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는 얌전히 사그라들었다. 주변에 사춘기 자녀가 있는 분들이 힘들어할 때 나는 우리 엄마 이야기를 해드린다. 곧 우리 아이들도 사춘기가 될 텐데 나는 아이의 사춘기 반항을 참아줄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엄마를 닮을 수 있을까?
엄마는 잡지 책이며 전단지, 내가 쓰다만 공책 같은 하얀 종이만 보이면 모나미 볼펜으로 끄적끄적 뭔가를 적으셨다. 나는 엄마 글씨 흉내를 내다가 엄마처럼 끄적거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없는 살림에도 큰맘 먹고 사주셨을 자연과학 전집과 명작동화책을 열심히 읽었다. 중학교 때는 ‘테스’, ‘죄와 벌’, ‘인형의 집’ 같은 고전을 사 주셨다. 장을 보러 가셨다가 책 한 권, 영어 테이프, 지구본을 사 주셨는데 그 물건들이 나의 꿈을 키워주었음을 이제 알겠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 영어 공부를 할 때는 엄마가 직접 영어 단어장을 만들어 주셨다. 스프링 수첩 왼쪽에 영어단어, 오른쪽에 한글 뜻을 적어준 엄마표 영어 단어장이었다. 나는 시험 전날에는 엄마를 못 자게 했는데 엄마는 꾸벅꾸벅 졸면서 함께 밤을 새워주셨다. 공부하라는 말 한번 없이도 공부 뒷바라지를 정성껏 해주신 엄마였다.
엄마와의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니, 엄마는 바쁜 시간을 살아내면서도 딸에게 예쁜 시간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알겠다. 내가 엄마를 좋아했던 이유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