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행복찾기
#1 오백 원
나는 떼를 잘 부리지 않는 아이였는데, 일곱 살 그날의 나는 현관에 앉아서 몸을 비비 꼬고 징징거렸다. 흰 러닝셔츠를 입은 아빠는 엎드려 누워, 큰 딸내미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과자 사 줄까?”
“아니이이이~”
“주스 먹을까?”
“아니이이이~”
“오백 원 줄까?”
내 기억이 거기서 끝난 걸 보니 나는 오백 원을 받고 생떼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아빠가 안아주고 뽀뽀해주신 다정한 기억은 없지만, 이 장면이 나에겐 뽀뽀와 포옹의 기억이다. 해본 적 없는 떼를 부려, 딸을 예뻐하는 아빠의 눈빛을 확인했던 그날을, 나는 사랑한다.
#2 아빠의 거짓말
“소영아, 너 나간 글짓기 대회에서 전화가 왔더라. 어른이 대신 써준 거 아니냐고. 너무 잘 써서 어른이 써준 줄 알았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글짓기 대회에 나갔지만 기대했던 상을 못 받아서 풀이 죽어있었다.
“뭔 전화가 와? 전화도 안 왔구먼.”
분명 엄마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나는 아빠 말만 골라서 철썩 믿었다.
‘나는 글짓기를 잘하는구나! 어른처럼 잘 써서 이번에 상을 못 받은 거구나.’
아빠의 거짓말 덕분에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나 보다.
#3 양과점 빵
그 시절 아빠들은 저녁 시간에 집에 잘 안 계셨다. 친구들과 술 한잔을 걸치고 거나하게 취해서 밤늦게 귀가하셨다. 1985년에 나온 ‘아빠와 크레파스’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한 손에는 뭔가를 꼭 들고서 말이다.
합리적 의심이 들어 이 노래의 원 가사를 검색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가사 중 ‘다정하신 모습으로’는 원래 ‘술에 취한 모습으로’ 였는데 심의에 걸려 가사를 바꾸었다고 한다. 역시, 우리 아빠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아빠가 한 손에 들고 오신 것은 크레파스가 아닌 양과점 빵이었다. 요즘은 양과점이란 말은 쓰지 않고 심지어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인데, 우리 아빠는 분명히 양과점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빵집이 귀했다. ‘○○ 제과’라고 적힌 비닐에 싸인 양과점 빵은 특별했다. 한 올 한 올 쌓인 질감이 느껴졌고 크림은 신선하고 달콤했다. 술에 취해서도 딸내미 먹을 빵을 사 오는 우리 아빠의 마음도 특별했다.
이제는 내가 엄마 아빠를 뵈러 갈 때마다 빵을 사 간다. 갈색 종이가방에 잘 구운 노란 빵들이 하나둘 쌓이면 엄마, 아빠가 맛있게 드실 모습도 함께 담아서 집으로 가는 걸음이 신이 난다. 우리 아빠도 그래서 ‘아빠 왔다!’ 자신 있게 외치셨나 보다.
#4 좀 더 있다 가지?
둘째를 임신했을 때 하혈을 한 적이 있다. 진단명은 계류유산, 다행히 유산을 면했지만 몸 관리를 잘해야 했다. 엄마는 그 소식을 듣자, 민어며 돌미역이며 보양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 앞으로 택시까지 타고 오셨다. 나는 그 길로 2주간의 병가를 내고 엄마를 따라 삼천포로 갔다.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자며 마음 편히 푹 쉬었다.
‘친정이 이런 곳이구나.’
출산하고도 받지 못했던 친정엄마 찬스를 톡톡히 누렸다. 몸을 추스르고 이제 올라가려는데 아빠가 한마디 하셨다.
“좀 더 있다 가지?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아빠의 그 한 마디가 엄마가 해주시는 밥 만큼 맛있었다. (엄마 미안)
#5 죄송합니다
자동차 사고를 딱 한 번 낸 적이 있다. 신규시절, 교육청에 출장 갔다가 주차할 곳이 없어 바로 옆 시장 근처를 빙빙 돌았다. 사람 걷는 속도로 운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할머니 한 분이 넘어지셨다. 할머니는 그날 바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내 잘못으로 아빠에게 SOS를 한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허름한 옷 중에도 가장 허름한 옷을 입고 진주로 올라오셨다. 그리고 병원에 함께 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몸이 어떠십니까? 저도 우리 딸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삽니더. 어서 쾌차하세요.”
아빠는 딸에게 한 마디 나무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고 아빠 방식으로 해결해주셨다.
#6 너도 너 벌어 먹고살아야지
결혼 전에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다가 스물일곱 살에 결혼하고선 내 살 도리를 했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후 용돈을 드리려고 했는데 아빠는 사양하셨다.
“너희도 집 사고 먹고살아야지, 아빠는 일한다이가!”
“새벽시장 가서 회 좀 사서 아~들 먹여 보내라!”
오히려 딸들에게 좋은 음식 먹여서 보내려 하셨다.
일흔이 훌쩍 넘으신 아빠는 지금도 일하신다. 직업병으로 귀가 안 좋아 보청기까지 낀 아빠는 전화도 놓치지 않으시려고 휴대폰을 목에 걸고 계신다.
“어뎁니까? 내 지금 밥 먹는데 2시에 갈게예.”
전화 받는 아빠 목소리가 70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옆에 앉아 아빠의 통화를 들으면 젊은 시절 아빠를 보는 것 같다. 아빠는 이제 일을 그만하실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도 일을 놓지 않으신다. 일이 없으면 무료할까 봐, 하는 일 없으면 술을 더 마실까 봐.
딸들도 일이 없으면 오히려 우울해지는 성미인데 아빠를 닮았나 보다. 그래도 연세 많으신 우리 아부지, 인제 그만 벌어 먹고사시면 안 될까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