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네, 우리 내일 뭐 할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올 때마다 나는 아이와 맞는 새 계절에 설렜다. 봄이 오면 벚꽃 보러, 여름이면 물놀이 하러, 가을이면 단풍 보러, 겨울이면 눈놀이하러, 계절이 가장 예쁘게 핀 곳으로 갔다. 아이의 그림일기를 꽉 채울 만큼 분주한 계절을 보냈다.
이제 우리 집 사춘기 아이들은 계절을 마중 나가자는 엄마 말에 시큰둥하다. 사계절을 너무 많이 만나서 그럴까? 아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계절에 관심이 줄어든 게 더 정확한 이유일 테다.
시큰둥한 아이들과 다르게 나는 여전히 봄이 주는 온기에, 여름의 진한 풀 냄새에, 가을이 오는 소리에, 뺨을 얼얼하게 하는 겨울바람에도 설렌다. 그래서 나랑 놀아줄 사람을 찾았다.
“엄마 아빠, 우리 내일 뭐 할까요? 내려갈게요.”
그리고 놀 곳을 찾았다. 남쪽 작은 도시인 이곳에는 가볼 만한 곳 스크롤을 계속 내려 보아도, 내 머릿속 지도를 샅샅이 훑어보아도 새로운 곳은 없었다. 대신에 다시 가고 싶은 곳인 사천 휴양림을 놀러 갈 곳으로 골랐다.
‘이번엔 집에만 있지 말고 꼭 나가야지.’
엄마 아빠와의 신나는 가을 외출, 나의 그림일기를 가득 채울 생각에 신나게 내려갔다.
“다 와 가나? 엊저녁에 말한 개미 약은 사 왔나?”
곧 도착할 거라고 전화를 했더니, 아빠는 개미 약을 사 왔는지 물어보셨다.
“이건 개미에 바로 뿌리는 약이고, 이건 먹이를 먹고 개미집에 가서 죽게 해서 박멸하는 약이에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약사님께 들은 걸 알은체하며 아빠에게 설명해드리고 개미 약을 집 곳곳 여섯 군데 붙였다. 이번에는 엄마가,
“아 맞다!” 하고 실손 청구할 진료비 영수증을 한 묶음 내미셨다. 뚝딱뚝딱 보험금 청구를 완료하고 후다닥 주방 정리도 해 드렸다.
이제 가을 보러 나가자고 말할 참이었는데, 새빨간 그물 속 터질 듯 차 있는 마늘 한 망이 보였다.
“오늘 마늘 까자. 김장할 때 넣을 마늘. 내 이거 언제 하나 생각만 했는데, 네가 와서 진짜로 다행이다.”
‘나 오늘 콩쥐?’ 놀러 갈 생각이 굴뚝같은데 일이 끝나지를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계모 계부도 아닌데 나를 잔칫집에 데려갈 생각이 없으셨다.
큰 대야에 물을 반 붓고 마늘을 반 망 풀어 담갔다. 마늘 껍질을 쉽게 깔 수 있도록 물에 불리는 거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 놀러 가기는 틀렸다.’ 바람든 마음을 똑똑 떼어내듯, 마늘을 한 쪽씩 똑똑 떼어냈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마늘 앞에 있었다. 덕분에 반 망이나 되는 마늘 껍질을 모두 벗겨냈다. 엄마는 깐 마늘에 물을 다시 붓고 ‘도도독’ 문질러 마늘 속껍질까지 마저 벗겨내셨다. 알밤 같은 마늘과 반짝이는 투명한 물이 가을 햇살을 만났다. 흥이 난 엄마의 리듬에 맞춰 물과 마늘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카메라를 들어 엄마도 찍고 마늘도 찍다가 시선을 끄는 파란색을 따라 카메라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엄마랑 아빠랑 놀러 가라고 부추기던 파란 가을 하늘이 거기에 있었다.
‘오늘 내가 만난 가을은 놀러 가는 것만큼 좋았어.’
가을 하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나들이 가는 가을도 좋지만, 마늘 까는 가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