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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Sep 12. 2023

결핍의 꼬리

 우울일지도 모르겠다. 희망찬 내일이 있다가도 선뜻 신나게 있질 못하는 지금은 예전부터 날 따라왔다. 아버지는 술과 사람을 좋아했다. 나름의 유머러스함으로 남들을 웃길 줄도 알았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엔 결핍이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내가 이기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부터 잘못되었다. 매학기 교무실로 불려가 등록금 납부 재촉서를 받아야만 했던 아버지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안다고 하는 건 이기적인 생각이다.


 잘생겼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어머니는 그 설렘도 잠시, 몇 해 지나 세 남매를 업어 키워야 했다. 아버지의 결핍의 원인이었던 집이 담긴 사진에서 본 어머니의 표정은 행복하지 않아 보였다. 탈출이란 단어가 어울려 버린 두 사람은 어느 아파트의 가장 꼭대기 층에 살림을 마련하였다. 아버지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86개의 계단을 매일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아버지는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술로 해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86개의 계단 하나하나에 울분을 토하였다. 가정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결핍에 감춰진 자기의 모습이 어떤지 모르는 것뿐이었다. 아버지의 결핍은 어머니의 미숙함과 만나 큰 싸움을 일으켰다. 나의 부탁으로 어머니가 A4용지에 어린아이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 내 뒤통수로 빨래 건조대가 떨어졌던 때가 기억이 난다. 그런 비슷한 날이 계속되었다. 손발이 떨렸고 울먹이느라 말이 어눌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알아차렸으면 해서 눈물을 머금고 등교를 했다. 어린아이답게 소리 내 울었다.


 어머니의 미숙함은 무관심이 되었다. 원래 이런 건가 하며 사춘기가 조용하게 지나갔다. 모두가 그렇듯 나도 내 정체성을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와 배려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했다. 경찰관의 제복이 멋져 정의와 배려가 넘치는 여경이 되기로 결심했다. 뜬금없이 대학 교재로 쓰는 '경찰행정학'이라는 서적을 구매했다. 나란 사람은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잘 모른다. 알려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무관심은 내가 경찰이 되지 못하는 데 큰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도 경찰이 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고 하셨다. 도전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서적의 어려운 내용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다 포기해 버렸다.


 아버지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말로 가족을 웃게 했다. 웃음 뒤엔 두려움이 있었다. 아버지의 어떠한 결핍은 언제 어디서 울분으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해온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빚하나 없이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새 집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아버지는 터져버렸다. 순식간에 우울감이 찾아온다. 이렇게 묘하고 울렁거리는 감정을 느낄 바에야 없어지는 게 낫다. 방에 있는 큰 창문을 생각한다. 창문에 박혀있는 하얀 철창살이 보인다.


 나는 어느새 꽤나 먼 곳으로 직장을 찾고 독립을 하게 되었다. 희망찬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면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잠시동안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내 안의 스트레스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다. 그 중 나쁜 스트레스는 숨기고 싶은 나의 결핍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내 결핍의 원인인 유머러스한 아버지와 설렐 줄 아는 어머니를 이제 와서 함부로 탓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집 안에서 보고 들은 것보다 밖에서 보고 들은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에는 나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괜찮고, 또 괜찮다고 해 본다. 결핍에 꼬리가 생겨 나를 따라왔지만 오늘도 잘 버텼기에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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