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양훈 Apr 22. 2024

뮤텔 주교 앞 구마실 신부의 보고서③

[신축항쟁 뒷이야기-14] 濟州島辛丑年敎難史 (부록) 발췌

김옥희 저 <濟州島辛丑年敎難史> 부록(번역)에서 발췌. (본 번역에서 전후 의미 전달이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번역 원문의 수정 없이 그대로 옮겼음)   

나는 한 소년¹⁸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순진하고 천진난만하며 좋은 신심(信心)을 가진 그리스챤으로써 그의 생활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선(善)을 위해 헌신적인 그 소년은 나를 위하여는 아직도 매우 가능성이 있는 가장 착한 보화였습니다. 그는 울면서 나에게 와서 관덕정(觀德亭) 광장에 몇몇 신자들이 묶여 갔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나는 지금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고 그들의 고통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아! 나의 이 순간들! 대정목사(大靜牧使)와 순찰대의 웃음은 무관심하였습니다!     


아! 나의 소년에게는 어떠한 고통이 닥쳐왔는지요! 한 방의 총소리와 함께 사격대가 목사관의 뜰에 도착했습니다. 거칠은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어디 있는가? 천주교 아이놈은?” 나는 순찰대에게 이 아이를 감추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 집은 벌써 포위되었습니다. 순찰대는 그 소년을 벽장 안에 숨겼습니다.     

  

대정(大靜)의 폭도들은 제주 성내의 몇몇 개인에게 물어서 내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서 안내되어서 목사관(牧使館)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소리치면서 나의 방을 빙 들러 포위했습니다. 이 순간에 대정(大靜)의 목사(牧使)가 도착하여 높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습니다. “조용히들 하시요. 그는 벽장 속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벽장에 있다! 모두 다 벽장을 열어라!” 한 애꾸눈이 이 아이를 잡아내었습니다. 어떠한 요란함이 있었는지요! 나는 이 순간에 뭇세 문 신부(文濟滿 神父)에게로(나의 생명을 두어야만 했습니다.) 쓸어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 이후 어떻게 의식을 잃은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 주님! 나의 아이는 잡혔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에게 총질로 여러 번 작난질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그의 의무를 생각하고 그는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예수 마리아”라고... 그 죽음은 부드러웠습니다. 어떤 무엇도 그의 생명을 도로 줄 수는 없습니다!     


이들 육식동물에게서 받은 나의 모욕들! 그들은 나에게는 죽음을 주는 결정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감히 나를 두드려 패려고 시도하지도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이 순간에 현익호(顯益號)¹는 항구에 들어왔습니다. 프랑스 배였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 채 다시 떠났습니다. 이날 밤 학살은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날 목사와 순찰대들은 그리스챤들의 명단을 그들에게 넘겨주도록 나에게 약속을 받기 위해서 감언이설로 속이러 왔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백성들이 나를 잡으러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구함을 받기 위해서는 목사의 옷을 걸치는 수밖에 없다고 나를 확신시켰습니다.     


백성들은 한 부인에 의하여 인도되어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성내의 폭도들의 두목에게서 구함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챤들의 리스트를 넘겨 주어야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극단의 이기주의였습니다! 나의     

거절에 대하여 순찰대들은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폭도들보다 더 크게 소리질렀고 나는 그리스챤들의 작은 명단 때문에 제주 성내 사람들을 비명에 죽도록 하는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순찰대들은 나에게 이야기하고서 나를 떠나게 하였습니다. 횃불을 들고 총을 어깨에 멘 그들의 앞으로 지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학살자 이재수(李在守)를 향하여 나아가게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종의 사랑방에서 그리스챤의 명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다시 주의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그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얼마만 한 시간을 보냈는지요! 모욕과 멸시와 쟁투 가운데서도 종들은 촌락 두목의 부인들이 주는 음식을 마구 먹어대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나를 다시 목사(牧使)의 집에 보냈고 나는 홀로 되돌아 왔습니다. 내가 무사히 돌아옴을 보면서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순찰대들이 앞에서 막았습니다. 목사는 제주 성내 사람들이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만일 내가 이 광경을 잘 이해한다면 목사가, 더이상 위험해지기 전에 나를 보호하겠다는 그 욕망을 나에게 보여주는 지금에 있어서, 그가 그 위험 속에서 교묘함을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는 이미 물러서지 않는 목사였습니다.      


이들 목사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챤들을 학살하기 위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내(城內)의 사람들과 폭도들과 함께 연락을 가졌으며 접촉을 항상 가졌던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제주 성내의 사람들은 나를 목사관(牧使館)으로 데려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사관에 보내졌을 때 두 서넛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신부님을 지키고 살리기로 약속을 하고 목사관으로 데려왔습니다.”라고, 그러나 그들은 대단히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나의 보호를 위해서 지나가기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루종일 이 섬의 세 사람의 목사(牧使)들은 한 곳에서 별 방책이나 방법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쓸데없는 만남으로 쟁론했습니다. 참으로 넝마주이 걸레같은 수작이었습니다!     


이날에 나는 체포되었고 다섯 사람의 그리스챤들이 학살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하나는 조아주의 집에 피신하였습니다. 아침에 그는 나에게 그리스챤들을 넘겨주도록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손님을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서쪽에 있었던 폭도의 무리들이 출발했습니다. 백성들을 속이고 배신했던 이 나으리들과 함께 방법없이 만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다음 날 정오경에 군함 한 척이 이 섬 앞바다를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상륙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날은 음력 4월 13일이었습니다. 이날에 나는 나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은 약탈되고 휩쓸리고 털렸고 손볼 수도 없을 만큼 비참하게 황폐했습니다. 밥 같은 것을 하기에도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14일 아침에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고 알렸습니다. 우리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하나가 보러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갑자기 연기 가운데 프랑스의 삼색국기가 휘날렸습니다. 아!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그것은 <알루엣뜨>호¹⁹였습니다. 사람들은 뿌아조넬 박신부(朴 神父)님을 다시 보았습니다.   

 

곧 <슐쁘리즈>호²⁰도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어제 성내(城內)를 지나갔던 배였습니다. 이후부터 박신부님이 떠날 때까지의 나머지 사정은 주교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박신부님이 출발하는 순간에 그는 <슐쁘리즈>호가 한 2일간 민중들을 진압시키기 위하여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Mornet 사령관²⁰은 목사에게 가장 엄격한 경비로 항구들을 감시하고 폭도들의 두목들을 체포하는 일에 그가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이날에 명령하였습니다.      


두 군함의 현존은 폭도들에게는 ‘소름이 끼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그의 명령 안에서 ‘프랑스인들은 폭도들 모두를 학살하기 위하여 왔으나 용감한 사람은 그들을 방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슐쁘리즈>호도 같은 날에 출발했습니다. 곧 그 군함은 수평선 위로 사라졌고 포수들은 언덕 위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폭도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 100명이 제주성내(濟州城內)에 있게 되었고, 그들은 폭도의 두목들에게 남아 있던 그리스챤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나는 목사를 보러 갔습니다. 그는 폭도들을 해산하게 하는 청을 하기 위하여 보내기를 원하였던 목사와 배불리 먹으려고 하는 때였습니다. 목사는 그곳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폭도들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목사(牧使)는 그곳에 저녁 9시에 돌아왔지만, 그는 역시 시간만 잃었던 것입니다.     


한편 폭도들은 그들이 원하였던 사람들에게 제주성내를 장악하도록 하였습니다. Mr. Sands²¹씨는 몇 사람을 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는 폭도들을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일상생활을 군인들이 지키는 보호 안에서만 보내라고 강요를 받았습니다.    

 

매일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마을의 토착인들과 마을 부인들이 그리스챤들의 새로운 학살 소식을 날마다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챤들을 ‘법국(法國)놈’과 ‘법국(法國)년’으로 취급하였고, 성내의 두목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위협이 되었습니다.    

 

폭도들은 성내의 같은 두목들 중에서 두 사람을 잡아 뽑아내었습니다. 다행히도 Mr. Sands 씨는 한 여신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기다리던 한 주일 후에 <알루엣트>호가 음력 4월 23일에 다시 왔습니다. 목사는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전함은 제주도에서 멀리 떠나서 목포에 가기로 정해졌던 것입니다. 신자들은 나에게 역시 목포에 가기를 청했습니다. 사령관은 50여 명의 신자들을 뭇세 신부에게 인도를 받아서 배에 싣고 목포에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군함은 목포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음력 4월 24일 200명의 군인과 15명의 경관, 사령관과 2인의 신목사(新牧使)²²와 찰리사²³가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폭도들이 해산하기를 명령했습니다.      


음력 4월 25일 그들은 제주성내의 폭도들을 모두를 해산시키고 두목들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나의 집에 자주 다녔던 3인의 유배자²⁴들도 체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신자들과 복사들을 학살한 뒤에 남아 있던 신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계를 초과하는 귀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Mr. Sands와 찰리사(察理使)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랍니다! 나는 한가지 내가 부당한 처사로 생각했던 군인들-나는 지키는 호위병을 철수시켜 달라고 Mr. Sands씨에게 청했습니다.     


나는 Mr. Sands씨가 나를 위하여, 신자들을 위해서 매우 잘 조치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존(現存)은 그가 여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가질 수 없었던 용기를 한국인들에게 주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이러한 조직 안에서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은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내가 여기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그들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나로 하여금 이곳이 싫증나게 되도록 애썼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들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신자들이 그들 스스로 지은 죄값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하며, 그리스챤들은 모든 악의 근원과 원인이 된다고들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반대하도록 허락되어 졌습니다!     


학살당한 그리스챤들을 위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인간의 부정적인 한 부분처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끝) 


<옮긴이 註>

¹⁸소년-具마실과 김원영 신부의 복사였던, 신재순(申才淳, 아구스티노·1884-1901)을 말함.

¹⁹<알루엣뜨>호-인천 제물포에서 출동한 알루이트호(L’Alouette).

²⁰<슐쁘리즈>호-중국 티엔진(天津) 타이구(太沽)에서 출발한 서프라이즈호(La Suprise).

²⁰Mornet 사령관-<슐쁘리즈>호의 선장.     

²¹Mr. Sands-샌즈(W. F. Sands)는 1874년에 미국 위싱턴에서 태어났고, 1898년 조선주재 미국 공사관 1등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1900년에는 공사직을 그만두고 고종 황제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러일전쟁을 보고 조선의 몰락을 예언해 조선의 중립화를 고종에게 제안한 적도 있었다. 또 1901년 제주도에서 신축민란(辛丑民亂), 즉‘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고종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에 들어와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샌즈는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과 함께, 미국 공사관이 철수하자 귀국했다. 1910년 이후에는 외교관을 그만두었으나, 국제문제 해결에 계속 관여하는 한편, 1927년부터는 조지타운대학교 외교대학에서 외교학 관련 강의를 맡아 1946년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출강했다. 이러던 중 외교관으로서 조선에서 겪고, 보고 들었던 일을 글로 써 1930년에 <조선비망록>을 발행했다


<조선비망록>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 서울의 외교사절, 영사재판, 황제의 고문관, 대궐 생활과 민속놀이, 조선인의 신뢰성, 여인의 나라 제주도-‘이재수의 난’ 등을 예리하게 관찰했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여인의 나라 제주도―이재수의 난’이라는 항목에 제주여성에 관한 기록이 상당량 나온다. 이는 샌즈가 1901년에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재해 달라는 고종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에 와서 겪고, 보고 들었던 내용 등이다. 이때 그는 프랑스 선교사를 보호해 준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웅 되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받았듯이,‘이재수의 난’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²²신목사(新牧使)-교난이 일어날 징조가 엿보이던 5월 10일에 제주 목사로 임명된 이재호(李在頀)는 제주읍성이 함락될 때까지 부임하지 못하고 있다가 5월 31일에야 프랑스 군함을 타고 제주에 부임했다. 

²³찰리사-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

²⁴3인의 유배자-유배인이며 천주교도였던 이용호, 이범주, 장윤선.

具마실 신부


이전 24화 뮤텔 주교 앞 구마실 신부의 보고서②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