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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09. 2024

나무는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中

나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약할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내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있어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외로울 때도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음―음―    


여섯 살 난 아이가 물은 적이 있다.

“엄만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그거야……”   

  

언제나처럼 내가 대답하려는데 아이는 얼른 내 입을 막으며 말했다.

“나 말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식구들을, 친구들을, 아는 이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그 다음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야 나무지……”라고 내가 대답하자 아이는 그제야 만족했다.

     

“그럼, 이제부터 엄마 별명은 나무야.”

아이는 달아나며 “한 나무, 한 나무!” 놀리듯 외쳤다.    

 

아, 정말 나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이름이 강(江)이 아니라 나무라면.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작년 가을의 일이다.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약하고 외로울 때도


내 마음


누더기,


너덜너덜 넝마 되었을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새벽에 들은 노래 1>이라고 이름 붙인 시다. ‘나무는 언제나 내 곁에/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내가 가장 약하고 외로울 때도’ 이 세 줄이 퍼뜩 꿈결에 새겨져 눈을 떴다. 일어나서 백지에 흘려 적고, 더 이어 쓰니 이렇게 되었다.     


그 뒤로 곡을 붙이면서 자연스럽게 가사가 달라졌다. 이 노래는 먼저 피아노 소리로 떠올랐었다.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하는 부분이 선연하게……     


정말 그랬다. 나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지난해 봄부터 여름까지 일시적인 천식을 앓았었다. 회복될 무렵 집 근처의 운동장을 처음으로 달려보았다. 혹여 다시 호흡 곤란이 올까 봐, 거의 걷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볍게 한 바퀴 달렸다. 초가을 오전의 햇빛이 작은 운동장에 가득했다. 달리기를 멈춘 뒤 터질 듯한 심장을 문지르며, 뛰었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걸었다. 

    

저기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었구나.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숨을 골라가며, 하나씩 세며 걸으니 모두 스물두 그루였다. 흰 우듬지, 흰 줄기, 흰 가지, 반짝이는 잎잎의 푸른 잎사귀들. 살아 있다는 것이 벅차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너무 벅차 오히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던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더 이상 나무를 보지 못하는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겨울날 뼈대를 드러내고 하늘을 향한 활엽수들, 봄날 연푸른 잎을 돋워내는 나무들. 그 줄기와 가지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그 잎사귀의 빛과 소리를. 그 꽃과 냄새를. 열매의 빛과 맛을.     


우리가 가장 나약할 때, 가장 지쳤을 때, 때로 억울하거나, 서럽거나 후회할 때, 가장 황폐할 때,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나무는 그 자리에 있다. 땅속 캄캄한 곳에서부터 잔뿌리들로 물줄기를 끌어올려 잎사귀 끝까지 밀어 올리며.     


그러니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때로 이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고요한 몸, 더욱 고요한 눈길로 이들을 떠올리기 위해서라도. 어느 날 거울을 보았을 때, 내 그을린 얼굴 대신 한 그루 낮고 푸른 나무가 비칠 때까지.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나무는) 全文.


아래 사진들-원대리 자작나무 숲, 2024. 11. 3 (러시아 문학 읽기 모임 홍천 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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