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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의 두 한국 무대

원전에 대한 충실함과 현대적 재창작 흐름의 두 연출

by 김양훈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은 1904년 초연 이후 “러시아 몰락 귀족의 표상”을 넘어 근대 연극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건의 극적 전개보다 인물의 내적 동요, 침묵 속에 흐르는 시간, 사회 구조의 균열을 통해 시대의 불안과 희망을 드러낸다. 한국 연극계가 이 작품에 매혹된 이유는 급속한 산업화와 사회 변동을 겪은 한국에서, 체호프의 세계는 단순히 낯선 러시아 귀족에게 몰아친 몰락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벚꽃동산》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세대 갈등, 부동산과 토지를 둘러싼 한국의 현실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지차트콥스키 연출 벚꽃동산 2막 장면, 라넵스까야 부인의 딸 아냐는 만년 대학생 뻬짜(뜨로피모프)와 사귀는 사이. 이들은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서적인 교감을 통한 사랑을 추구한다.

한국에서 《벚꽃동산》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흐름의 연출을 통해 무대를 장식했다. 첫 번째 흐름은 원전(原典)에 대한 충실한 접근이다. 2010년 예술의 전당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오른 러시아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Grigori Ditiyatkovski)의 공연은 그 대표적 사례다. 그는 원작에 나타난 사실주의적 정서를 따르면서 규모가 큰 벚꽃 무대를 통해 상실과 서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무엇보다 배우 신구가 연기한 늙은 하인 피르스는 극의 마지막에 홀로 남아 파멸을 맞이하는 장면을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이 장면은 체호프가 의도한 “한 시대의 종언”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이 무대는 한국 배우들이 체호프가 도입한 사실주의 연기의 섬세한 결을 체득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관객에게는 고전의 진수를 경험하게 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사이먼 스톤이 서울 버전으로 재창작한 연극 '벚꽃동산' 장면.사진=LG아트센터

다른 흐름의 하나는, 고전을 과감히 현대화하는 최근의 시도이다. 호주 출신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2024년 서울과 부산에서 선보인 《벚꽃동산》은 무대 배경을 오늘날의 서울로 옮기고,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사회적 맥락을 한국 현실에 맞게 재구성했다. 재벌과 부동산, 세대 갈등이라는 요소가 작품에 삽입되었고, 따라서 러시아 귀족의 몰락은 곧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대체되었다. 전도연, 박해수 등 스타 배우들의 캐스팅은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했고, 무대는 고전이 지닌 보편성과 함께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동시에 포용했다. 더 나아가 이 공연은 홍콩 투어까지 성사시키며, 한국 연극이 세계 무대와 호흡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두 연출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지차트콥스키 연출이 원전의 서정과 사실주의적 연기를 통해 체호프의 진수를 한국 무대에서 보여 주었다면, 스톤판은 고전의 현대적 변용을 통해 관객층을 확장하고, 고전이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의 언어”임을 보여주었다. 전자는 고전을 보존하는 태도를, 후자는 고전을 재창작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 둘은 대립이라기보다 상보적이다. 한국 연극계는 이 두 길 위에서 고전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오늘의 관객에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생각하게 한다.

《벚꽃동산》이 남긴 교훈은 고전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롭게 호흡하는 생명체라는 점이다. 원전을 충실히 살리는 작업이 배우와 연출가에게 깊은 연기적·미학적 훈련의 장을 제공한다면, 현대적 재창작은 관객과의 접속을 확장하고, 고전이 여전히 동시대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한국 연극계가 체호프를 포함한 고전을 무대에 올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태도의 균형일 것이다. 원전의 미묘한 정서와 침묵의 힘을 존중하면서도, 지금 여기의 문제와 긴밀하게 접속하는 연출적 상상력, 그것이야말로 《벚꽃동산》이 한국 연극계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이자 앞날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벚꽃동산’의 사이먼 스톤 연출가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사이먼 스톤 연출이 재창작한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 서울판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사이먼 스톤 연출 2024 벚꽃동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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