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think you love your job”
본제: “더는 내가 별로 안 미워” + “I think you love your job”
바빴다고 변명하려면 끝도 없다. 낯선 곳들에서의 여행. 새로운 인연, 누군가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이야기. 돌아보니 한 것은 많은데 쌓은 것은 별로 없는 두달의 시간이 흘렀다. 하루가 이리 짧나 싶을 정도로 침대에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쯤 다시 런닝을 시작했다.
기숙사 문을 나서면 도보 3분 거리에 훌륭한 바다가 있다. 해가 한창 긴 시기라 오후 10시쯤 운동복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한다. 친구들이 운동 기록 앱을 함께 사용하자 권유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 뛴다고 상상해봤다. 실제로 옆에 있든, 온라인상으로 함께 달리든 런닝을 하면서 누군가의 템포에 맞추고 내 기록을 경신하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됐다. 런닝은 더이상 운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왜 런닝을 할까. 문득 런닝을 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이번처럼 허송세월을 보내는 자신이 한탄스럽거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를 감당하기 힘들 때, 가끔 너무 많이 먹었을때. 몸이 가장 가벼울 때는, 다리가 가장 잘 움직일 때는 스트레스가 시발점인 경우다. 대개의 스트레스는 흑역사와 함께 따라오곤 하는데 이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몸에서 잘 달릴 수 있도록 에너지를 제공한다. 분노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의 전환이라니 얼마라 효율적인가 싶지만 대부분의 분노에너지는 전환보단 유지를 선호한다.
이것들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에 몰입하거나 음악에 집중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 런닝할 때 듣는 음악의 종류는 정해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기현의 <Youth>. 제목처럼 청춘, 혹은 사회의 시선에서 청춘이 조금 지난 시점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프랑스 입국 한 달 전부터 주구장창 이 노래를 들었고 한국 입국 네달을 남긴 지금 다시 듣고 있다. 그땐 무지한 곳에 도착하는 내가 불안해 들었고 지금은 무지해졌을 나를 두려워하며 듣는다.
뭐가 그렇게 두려울까. 한국에 돌아가면 빼도박도 못하게 스물다섯 살이 되는 것? 에라모르겠다 정신으로 과제를 제출하지 않아 추가 학기가 확정된 것? 두려움의 원인이 자의와 타의 다양한 것을 보니 두렵지 않을 방법은 없다. 두렵기 싫어 침대에서의 회피를 반복했고 반복이 두려워 런닝에 나서며 기현의 <Youth>를 재생했다. 자신을 어리석다 느꼈던 과거의 그와 그때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지금의 그.
서울의 하늘을 만끽하고 우산 대신 온전한 비를 택한 그처럼 나도 파리의 비를 택했다. 리옹에서 알게 된 벤과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비 오는 파리에서 일곱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라고 노르웨이에서 일하는 그는 나무와 배, 음식 이야기를 할 때 눈이 반짝였다. 각자가 살고 싶은 집을 설명할 때 내가 원목 테이블 사진을 보여주자 그것을 만드는 방법부터 자신이 만든 테이블의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배를 관리하는 게 그의 직업이라지만 이토록 원초적인 이야기에 흥분하는 사람이라니. 텐션이 높아진 그에게 말했다. “I think you love your job” 그는 미소 지으며 그렇다고 답한다.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느낀 불안은 취업에 대한 것이 9할이다. 경제를 사랑했기에 학과를 택했으나 갖고 싶은 직업은 명확했다. 허나 어떤 이유로 2년 전 이 꿈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벤은 유럽에서 그 직업을 가지면 되지 않냐고 묻지만 언어의 장벽이 높은 걸 알지 않냐고 답을 얼버무린다. 이렇게 나의 한계를 다시 자각한다. 허나 동시에 어쩌면 내가 너무 좁게 미래를 그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밤 11시에 런닝을 뛴다고 하면 앞이 보이냐 친구들이 묻는다. 어렴풋이 보인다. 이러다가 자빠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앞이 깜깜하다. 이땐 가늠이란 것이 무용하다. 저 앞에 보이는 나무까지만 뛰기로 마음 먹는다. 밝을 땐 목표물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호흡을 어떻게 조절할 지 가늠할 수 있다. 허나 약간의 빛에만 의지하는 어둠속에선 달려도 달려도 나무에 닿지 않는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제어의 기능을 잃은 눈 대신 발밑은 더욱 민감해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당장 내가 서 있는 발 밑 또한 보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나무까지 닿지 않으면 어떤가. 가늠의 능력은 내 능력과 욕구를 온전히 인정할 때야 비로소 갖춰지는 것이다.
나무에 가지 않으면 어떤가. 인정과 수용을 갖춘 사람은 목적지가 바뀔지라도 어둠속에서 작은 빛을 찾아낼 능력을 지닌다.
샌들에 맨발이 일상인 벤은 1호 사이즈의 축구공을 챙겨왔다. 우리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었고 그는 공을 꺼내들었다. 자신은 항상 맨발로 공을 찬다고 말하는 그를 따라 나도 풀을 밟았다. 신발을 신지 않아도 괜찮냐는 그에게 "no problem"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한다. 집에 돌아가는 기차 안. 신발과 풀에 물들어 파랗게 된 양말을 보며 미소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