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잘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 감정을 묻곤 한다. 잘하고 있는지, 잘못된 건 없는지. 요즘의 작은 문제는 이 질문의 방향이 내가 아닌 낯선 사람을 향한다는 것.
여행지에서 동행을 구했다. 동행의 대부분은 일상의 시간을 쪼개어 여행을 온 사람들. 그들은 내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묻고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다 답하면 놀라며 1년이라 연이어 답하면 부러움을 표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부러워요? 왜요?”
처음엔 잘못됐다 생각하지 않았지. 허나 다른 나라에 방문했을 때 또 다른 낯선 이에게 이 질문을 던졌고 그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타이핑 그대로 묻는다. '부러우세요? 왜요?' 말을 놓기로 했다면 '부러워? 왜?'. 안타깝게도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은 어조가 매우 공격적이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는 답변에 대한 단순한 리액션이었을 텐데 리액션의 대한 이유와 확신을 묻는다. 그녀는 왜 그렇게 질문할까.
반년쯤 지나고 나니 기대와 걱정은 정확한 반비례 관계를 가지게 됐다. 학점 이수에 관해 추가 학기나 계절학기를 고려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여기에 한몫했다. 친구들은 한국으로 모두 떠났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할 일이라곤 밥 차리고 치우는 게 전부다. 오죽 할 일이 없으면 밤 런닝을 꼬박꼬박 나가겠나. 인정욕구가 크고 성취감으로 살아가는 주체에게 간섭 없는 삶이란 꽤나 힘들다. 누군가 옆에서 말이라도 걸어주고 교수님이 과제라도 내줘야 하는데 그럴 사람도 환경도 없다.
일을 만들어 하면 되지 않겠냐고 물을 테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하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벌인 일들은 성취감 위에 또 다른 성취감으로 완성된다. 허나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펼친 일들은 쌓이기보다 그 백지를 채우기 위해 계속 옆으로, 옆으로 이동한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놓은 말들로 빈자리의 공허함이 더욱 각인된다.
공허함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타인의 감정 대신 가장 가까이 위치한 감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