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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그덕 꽝! 하늘에서 땅으로

목표에 매몰되었을 때

by 낭낭

비가 올 때 산을 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산을 걷다 보면 축축한 진흙에 한 발 한 발 박아가면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머리를 위로 올리면 눈두덩이와 이마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리산은 달랐다. 높은 고도에 걸맞은 지리산은 내가 산을 타고 있는 건지 구름 속을 걷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가 아닌 그저 존재하는 비.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옆에 계속 존재하면서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공간에 계속 살아있는 비. 구름의 바닷속을 헤엄치며 나아가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동이 트고 해가 점점 하늘 가운데로 올라가면서 빛이 길을 밝혀주었다. 그러나 쨍한 햇살이 내려오는 것은 아니고 구름 끼인 회색빛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휴대폰 밝기조절하듯 빛이. 비는 더 강해졌다. 후두두두두 내리는 비로 인해 눈앞을 분간하기도 힘든 상황이 왔다. 나뭇잎을 우산 삼아 비를 피하고 몸을 숨겼다. 노고단 고개까지 5.5킬로. 폭우를 만난 가장 아찔했던 순간. 오르막이 잠시 숨을 가누는 평지를 만났을 때 이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덜 젖은 바위에 앉는다. 발이 물집 안 잡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해서 발가락 양말에 등산양말까지 새로 구매했는데, 비가 오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야광 우비를 입고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노려본다. 빗줄기가 힘을 조금 잃자 바로 간다. 이렇게 된 거 선택은 하나뿐이다. 최대한 빠르게 숙소를 가서 쉬는 것. 발을 아끼고 어깨와 허리를 아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폭우 속 리포타 낭낭

다행히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자, 구름은 쏟고 싶은 비는 시원하게 다 쏟아내렸는지 비가 점점 멎어 슬슬 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첫 휴게공간에 도착했다. 곰을 조심하라는 아저씨가 있던 조의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식으로 칭찬해 주었다. 믹스커피 한 잔을 따뜻한 물로 해서 타 주셨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믹스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 지리산에서 먹으려고 전날 먹다 남겨 싸 온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으며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다. 비에 젖은 몸은 바들바들 떨린다. 쉼터는 공사 중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산 위로 이 사람들은 어떻게 올라오는 걸까. 저 건축자재들은 다 어떻게 실어지는 걸까. 참 인간들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는 간단한 요기를 하고 바로 길을 나섰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아쉽지 않았다. 이 산을 함께 걷고 있으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 사이를 가는 것은 정말 미끄럽고 어려운 일이다

빵을 다 먹고 충분히 휴식을 하니 사람들이 쉼터에 하나둘씩 도착한다. 다들 고생한 모습이 역려하다. 그런데 대화보다는 혼자만의 고독을 선택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빠르게 숙소를 도착해서 달콤하게 잘 수 있기를 바랐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누울 수 있는 곳에서 누울 수 있기를. 다행히 비는 더 이상 오지 않고 몸도 어느 정도 풀렸다. 11시 반. 2시간 정도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얼마 안 남았다.


마지막 길은 능선길로 걸어가기 나쁘지 않은 길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조금만 걷다 보니 갑자기 바위길이 등장했다. 건너가기도 어려울 뿐더러 길도 좁았다. 설상가상 비가 와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실족할 것 같은, 골로 갈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이런 길을 10킬로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지나가야 한다니, 미쳤다 생각하면서 어쩌겠어를 생각하면서 계속 간다. 지리산을 오겠다는 것을 후회할 생각도 안 들었다. 정신을 다른 데로 팔면 정말 목숨이 위험할 거 같기 때문에. 나의 발목이 이를 견뎌낼 수 있을까. 친구야 제발 버텨주라. 제발제발제발. 이 산은 잘 내려가야 하지 않겠니. 좀만 힘내자.


내가 바위인지 바위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바위에 밀착을 하며 발을 내디뎠다. 돌에 밀착해서 한 발 한 발. 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는 길을 따라간다. 검색? 그따위 것은 없다. 인터넷이 터지지도 않는 깊은 산속에서 내가 의지할 건 이곳을 이전에 온 사람들이 걸어간 길과 이를 관리해 주는 지리산 사무소의 노력들 뿐.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며 맞을 거다라며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의심과 고뇌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 드디어 벽소령 대피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왔다. 잘 왔구나. 길을 벗어나지 않았구나. 그렇게 조금 더 가서 지친 몸을 쉬게 할 수 있는 평평한 바위를 찾았다.


이제 대피소까지는 기껏해야 8킬로미터. 10-20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바위에서 좋은 경치 보며 쉬는 것도 좋지만 너무 목적이 삶을 이끌어버렸다. 짧은 휴식을 갖고 겨우 10 발자국도 안 떼고 나서 갑자기 왼쪽 발목이 꺾이면서 귀까지 뚝! 소리가 들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뿔싸. 15분 남았는데. 부상이라니, 이 산 위에서 부상이라니!!!


그래도 산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인가.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아찔해졌다. 만약 오른쪽 발을 삐었다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지. 정말 어쩌지. 그래도 갈 수밖에 없었다. 절뚝거리며 한 발 한 발. 10분 걸릴 거리는 결국 30분이 걸렸고 드디어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피소에는 선두에 있던 아저씨들과 아주머니가 쉬고 있었다. 나를 보고 반겨주었으나 다친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셨다. 알고 보니 세 분은 친구셨고 아주머니는 약사였으며 발목이 너무 부어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하며 발목에 효과 좋은 파스를 발라주셨다. 아저씨들은 괜찮다고 그냥 올라가라고 했지만 나는 상황을 지켜보고 내일 결정을 내리겠다고 얘기했다. 3분은 장터목에서 쉬는 것이 목표였고 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대피소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발목 삐기 전 물에 빠진 생쥐꼴

대피소가 열리자 원래는 판매하지 않지만 붕대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발을 감싸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숙소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진 않았다. 발에서 그렇게 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걱정이 산처럼 쌓였으나 어쩌겠나,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인걸. 날은 갑자기 너무 좋아져서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운해 위에 서 있고 눈앞에는 끝없는 산맥들이 펼쳐졌다. 그래도 이곳까지 온 나 자신이 대견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마냥 웃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발을 삐다니. 대단하다 정말. 숙소에서 쉬다가 배가 고파 나오니 다른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부상당한 나를 안타까워한 한 아저씨는 밥 먹으라며 고기를 구워주셨다. 고기라니....한국인들은 얼마나 더 대단해지려는 걸까. 이 산까지 고기를 가져와서 굽는다니 그저 리스펙이다. 맛있게 먹고 감사한다고 얘기하고 이른 잠을 청하러 갔다. 한 아주머니와 여자 숙소 전체를 사용했다.

고기 주신 아저씨 감사해여
대피소 풍경….미쳤음 너무 예뻐
밤이 내린 지리산

아침에 슬며시 밀려오는 냉기에 눈을 떴다. 아침 퇴실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닫고 짐을 추려 나왔다. 발은 부어올라서 도저히 정상을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장터목 대피소 숙소를 취소하고 쉼터지기 아저씨의 말을 따라 평탄한 길로 내려가기를 마음먹었다. 그래도 밥은 먹고 가야 하니 지리산 온다고 구매한 버너를 사용해 라면을 끓여 먹는다. 다쳐도 할 건 다 하는 의지의 한국인 나야 나.

아침밥

이제 내려가는 것이 문제인데 500미터 가파르게 내려가면 편한 길이 나온다고 해도 편한 길을 쭉 걸어가는 것도 문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는데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졌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무슨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가는 것처럼 박스에 식재료를 잔뜩 싣고 산 위를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인사를 하고 갔는데 한 두 명도 아니고 몇 명씩이나 그렇게 올라오니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초인들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파른 길을 다 내려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트럭이다!!!!


알고 보니 쉼터와 대피소 공사를 위해서 자재들을 옮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발목 다쳐서 절뚝거린 상태에서 트럭을 보고도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먼저 태워달란 말은 또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다. 그래서 트럭 앞을 절뚝거리며 걸어가니 막 출발을 하려는 기사님이 태워드릴까요 물어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올라타 좁고 굽이치는 길을 내려간다. 친절하신 기사님은 시외버스터미널로 바로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에 나를 내려줬다. 지방에 있는 친구에게 다리를 다쳐 오늘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할 거 같다고 이야기한다. 갑자기 눈에 들어온 냉면집에서 냉면 한 그릇을 때리고 생각보다 추워 오들오들 떨며 서울로 올라왔다. 다행히 오후 중에 올라와 병원으로 바로 갈 수 있었으며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장기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무려 1달을 내리 깁스를 하고 다녔다는....

내려가는 트럭에서 찍은 풍경. 왼쪽 아래에 트럭 사이드 미러ㅋㅋ 아저씨가 홍시도 권해주셨다.

휴식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실감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부상을 입은 것도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이루어진 일이었겠지. 해 본 적은 없지만 번지 점프나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 우리가 내려가는 곳만을 본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 주변을 보며 광경을 좀 즐기고 해야지 모든 과정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일 텐데 너무 앞만 보고 달렸던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쉽게 변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쉴 때는 쉬자. 경주마처럼 가다가는 바닥으로 고꾸라져버리기나 할 테니까. 이 공중의 시간을 진짜 잘 지내야 부상도 없이 강하게 내려올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결국 깁스 엔딩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웃김....

2박 3일 생각하고 올라갔는데 바로 담날 집으로 돌아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 참 어디로 튈지 모른다.

지리산 도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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