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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함께

엄습하는 부상의 구름

by 낭낭

어렸을 때부터 온갖 운동을 좋아했다. 살은 쪘지만 경쟁심이 아주 강했고 노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히는 스포츠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는 외모와 상관없이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 다양한 운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이스 스케이팅, 배구, 농구, 발야구 등등. 그중에서 농구를 정말 좋아한 나는 초등학교 시절 먹고 남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말려서 부상 입은 손가락에 깁스를 할 정도로 부상이 익숙했다. 깁스 전문인으로 자라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한국에 오고 나서는 검도, 탁구 외에는 스포츠를 많이 하지 못한 거 같다. 늘 그렇듯이 수능 준비나 해야지 무슨 운동이었겠나 운동은. 체육대회를 위한 탁구 훈련은 스스로 아프다고 세뇌를 해서 메소드 연기법을 택하여 진짜 몸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왔을 때 선생님에게 조퇴 허락을 받고 학교 변두리를 벗어나서야 멀쩡해져서는 주변 체육관을 가서 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체육대회 기간 때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를 지나고 몸을 쓰는 다양한 활동들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나는 깁스와의 인연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깁스.jpg 나는야 깁스 전문가~ 깁스하고 샤워하고 걷고 뛰고 계단 오르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롱~


택견을 하면서 물구나무 연습 하다가 발목 삐기, 하우스(스트릿 댄스의 한 장르이다) 수업 직전에 홀로 있는 연습실에서 몸 풀다가 발목 삐기, 그리고 대체로 술 먹고 집에 걸어가다 발목 삐기(아마 이걸로만 3번 정도 삐었을 거다) 등의 역사를 거쳤지만 최고의 썰은 아무래도 지리산 종주를 마음먹었던 해였을 거다.


바야흐로 2022년 가을. 너무나도 좋은 날씨와, 이보다 좋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컨디션과, 3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던 추억이 몽글몽글 단풍과 피어오르던 한 때 갑자기 지리산 종주를 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언젠간 한 번은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왜 하필 그때였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명확한 것은 나는 지리산 종주를 마음먹었고 그를 위해 준비에 착수했다.


KakaoTalk_20250514_101425610.jpg 지리산 지도로 뽑은 첫 번째 장. 성삼재분소에서 시작해서 반야봉을 거쳐 벽소령까지 가는 것이 첫 목표였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하여 벽소령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장터목에서 2박을 그리고 천왕봉을 찍고 내려와서 경남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하나의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27일 동안 산티아고 길을 걸었으니 2박 3일간의 등산이 그리 큰 계획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할 만하다는 생각과 마음속에 솟구치는 설렘만이 가득했을 뿐이다. 지도를 인터넷으로 다운받고 종이로 뽑고, 코로나 때 닫혔다가 마침내 열린 대피소를 예약했다. 노고단으로 가는 새벽 차가 동서울에서 출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새벽 산행을 위해서는 헤드랜턴이 필수라는 정보를 입수해 순레길을 먼저 갔었던 순례 중독자 오빠에게 선물로 사달라고 졸랐다. 며칠 뒤 쿠팡으로 아주 작지만 유용한 헤드랜턴이 나의 품에 들어왔다.


극단이 당시에 공연을 올릴 준비를 하는 중이었는데 오퍼레이터를 구하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었다. 아, 내가 어디 해외를 갔다 왔었나? 어찌 됐든 어딘가를 갔다 와서 연습에 놀러 온 나에게 오퍼레이터 제의가 들어왔고 지리산에 가야 하는 나는 지리산 이후면 된다는 말을 듣고 여행 후의 일자리까지 예약하고 떠날 수 있었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이렇게 갑작스런 지출이 있었도 갑작스러운 일거리가 생기면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돌아올 곳까지 마련이 되고 순레길을 함께 한 배낭과 2박 3일 동안 먹을 식료품들, 새로 산 아주 귀엽고 소중한 휴대용 버너, 헤드 랜턴 등을 가지고 출발하려는 날,


서울에서 미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만 내리는 비겠거니. 핸드폰을 켜서 날씨 예보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노고단에는 다행히 몇 미리 내리지 않는다는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잡고 싶은 동아줄 같은 정보가 있었고 함께 사는 언니에게 저기는 비가 오지 않는다며 안심시키면서 동네에 있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 11시 30분인가 출발하는 동서울의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차 위에 올랐는데 혼자 온 사람은 놀랍지 않게도 나 혼자였다. 빗줄기는 계속 강하게 내려 차창을 때렸다. 편히 눈을 좀 붙여야 산을 오를 힘이라도 생길 텐데, 작은 불안감의 불씨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스는 비 오는 축축한 거리를 내달려 노고단을 향해 나아갔다.


노고단 버스.jpg 동서울 발 노고단행 우등버스. 앤티 앤 프레첼 하나만 있으면 행복한 여행길이 시작하지만 퍼붓는 비 때문에 엄습하는 불안감에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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