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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으로 구름 속으로

노고단을 시작으로 떠난 항해

by 낭낭

노고단을 향하는 버스는 11시에 동서울을 출발해서 촉촉이 젖은 도로 위를 달렸다. 서울을 벗어나니 창문을 투둑투둑 치는 빗방울은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를 달리고 있을 때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어두운 창밖을 바라봤다. 걱정되는 마음과 설레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우등버스이지만 불편한 좌석에서 꿈틀대며 선잠을 맞이했다.

떠나기 전 언니가필름 카메라로 찍어준 사진. 산티아고를 함께 걸은 거대한 반려배낭과 다시 떠났드아.

마침내 새벽 3시 30분경에 노고단에 도착했다. 딱 봐도 등산이 취미인 것처럼 보이는 장비 충만한 어른들 사이에서 자기 몸에 맞기에는 터무니없이 큰 가방을 가지고 내렸다. 노고단에 내리면 무인편의점이 등산객들을 맞이한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 중턱에 홀로 빛을 발하는 노란색 간판이라니. 달의 빛을 뺏은 편의점에 들어간다. 무인편의점은 처음인데.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카드를 이리 대고 저리 대도 남들처럼 ‘띠링’ 하는 명쾌한 소리가 나지 않아 들어가는 중년 남성의 등을 졸졸 따라 들어갔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분주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핏 들리기로는 비와 관련된 이야기 같았다.


새벽같이 잠들고 있던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을 켜고 날씨예보를 보니 떠나기 전에는 해봤자 2mm밖에 아니었던 예보가 갑자기 시간당 30mm로 바뀐 것이다! 세상에. 시간당 30mm라니 가늠조차 안 되는 환경적 상황이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겠거니. 심지어 오전 7-8시쯤에는 비가 더 강해져 시간당 70mm가 예보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건 진짜 나를 보내버리려는 신의 뜻인가 싶었다. 그런데 어찌하나. 돌아가는 차는 없고 5시간이나 걸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라고? 그건 또 무슨 수로. 돌아가는 길은 사전에 없었다. 앞을 가는 길뿐. 그리고 역시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듯 여기까지 온 시간을 그냥 허비할 사람은 없었다. 미친 비 예보에도 노고단 입산 시간인 4시 반이 되자 사람들은 저마다 가방을 메고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리산 국립공원으루들어갈 때 처음으로 맞이해주는 거대한 지도. 저 안내도로 지리 파악 가능하다? 당신을 지도의 신으로 임명합니다.

아직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아 입는 순간 땀폭발하는 우비를 바로 입진 않았다. 어두운 산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와 구름 사이를. 구름 사이로 달이 자취를 감춰 의지할 빛이라곤 머리 위에 달린 자그마한 헤드랜턴의 빛뿐이었다. 새벽이슬과 비냄새를 뚫고 걸었다. 생각보다 길은 걸을만했다. 나무 사이를 인디애나 존스가 된 것 마냥 뚫고 오랜만에 만난 대자연 속에서 폴짝폴짝 신난 발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동 틀 무렵의 지리산 국립공원

생각보다 등산이 체질에 맞는지 걱정만큼 등반이 힘들지 않았다. 걱정이 컸으니 자연스레 발밑을 주의하며 등산을 했다. 이미 등산화는 젖을 대로 젖었는데 비가 오니 그건 당연한 이치였다. 중간중간에 휴식을 잘 취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이 바로 휴식이었다. 잘 쉬어야지 발에 물집 관리도 되고 불필요한 부상을 예방할 수 있다!) 가지고 온 간식들을 틈틈이 잘 먹고. 그렇게 가다 보니 한 팀, 두 팀. 어느새 선두에 있는 중년 아저씨 두 명과 중년 아주머니 한 분이 있는 팀과 선두를 주고받으며 등산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만의 페이스로 걸었으면 되었을 것을…(복선..) 나만의 이상한 경쟁심리가 또 발동해 이 페이스를 유지하고 싶다. 한 번 더 중년의 무리와 선두를 다투고 먼저 지나가다가 쉬기에 알맞은 돌을 발견해 맛도리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고 있는데 그 무리가 오면서 간단히 안부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산 잘 타네. 혼자 오셨어요?”

“네 “

“겁 없는 아가씨구먼. 곰 조심하세요”

“네?”

“왜 플래카드 붙어 있었잖아요. 지리산에 곰 있어요. 조심하세요.”


세상에 곰이라니. 플래카드를 못 본 것은 아니다. 몇 번을 지나쳤지만 에이 설마 하며 계속 나아갔다. (정말이지 안전불감증이다) 그런데 이걸 산 타는 사람한테 직접 듣다니. 아니 도대체 이건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 진짜 조심하라는 건지 씨익 웃고 지나간 아저씨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원망스럽다. 불안이 증폭한다(복선222)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왔는데. 선두에서 두 번째인데.

헤드랜턴과 실족예방을 위한 발광 우비. 뿅

동이 트고 안개가 선명해지면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비를 꺼내 입고 다시 축축한 길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래도 숙소를 빨리 도착하면 되지 않을까. 해가 뜨니 곰이 나타나도 볼 수 있을 터라고 생각했다.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분명 달려서 도망가지 말고 죽은 척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부디 그것이 맞는 말이기를,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간다. 어느새 첫 숙소와 출발점의 반에 도착을 했다. 불안해도 괜찮을 거다. 큰일 없을 것이다 스스로 되뇌며 계속해서 길을 나아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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