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에서 낙하
그래 차라리 잘 됐다.
늘 계약직으로 일을 했어서 해고를 직접적으로 당해 본 적은 없다. 계약이 만료되면 일을 그만하는 것이 맞으니까. 그렇다고 계약을 연장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느냐. 글쎄 그만큼 딱히 정들었던 알바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연극 작업을 할 때에는 계약이 만료라기보다는 작업이 만료되는 것이라서 연장이 어차피 안 된다. 작업은 늘 하고 싶지. 그런데 작업이 끝나면 작업을 할 수가 없지. 업계가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을 껴안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그렇지. 하.
어쨌든 잘렸다.
다른 일을 향해 가고 있는 나는 조금 씁쓸하긴 해도 그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이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잘 됐다. 오랜만에 정든 알바인 것은 참 아쉽지만 어쩌겠냐 인생이란 그런 것을.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장이 나를 자르고 싶다면 잘리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같이 일하는 오빠가 연락이 왔다.
"너 괜찮아? 일 안 해도 돼?"
"뭐 어쩌겠어, 일정 애매한 것도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됐지 뭐."
"어허, 그래도 이거 맞아? 한 번에 두 명을 자르는 게?"
"그게 뭔 말이야?"
"주방 이모도 잘렸잖아"
"엑? 그게 뭔 말이여???"
알고 보니 나만 잘린 것이 아니었다. 눈치를 많이 보는 성정인 나는 애초에 내 탓으로 돌렸지만 갑자기 이모까지 잘렸다는 얘기를 듣고선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 건가 싶었다. 인원감축은 알고 보니 나와 이모에게 이루어진 일이었고, 이제 갓 3달을 지낸 나와 달리 이모는 다음 달이 되면 딱 1년이 되어서 퇴직금을 받을 때였다. 그전에 손을 쓴 것인지 뭔지 참......
치사하다! 아직도 이런 악덕 고용주가 있다니!!!
"심지어 직원 휴게실까지 없앤데"
"엥, 그건 또 무슨 말이여?"
"말 그대로지, 직원 휴게실 그냥 없앤다는데?"
허허.... 노동자의 복지가 이렇게 바닥을 치다니, 정의를 외치고 평등을 외치며 연극을 하는 나는 이것을 그대로 두고 봐도 되는가.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이제 30대도 진입도 아닌 30대 벌써 몇 년 차다. 돈 갖고 이런다, 아니, 이건 그냥 아니다. 그냥 물러날 수 없다.
출근을 하고 보니 직원들도 알바들도 모두 다 기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원 감축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바쁘면 진짜 바쁜 곳인데 혼자서 홀을 다 보는 게 가능할까, 같이 일하는 언니의 한숨이 계속해서 깊어 갔다. 그러면서 차라리 잘 됐어라고 나에게 얘기한다. 그래 잘 된 건 잘 된 거지만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 서칭을 어느 정도 완료하고 나서 이모에게 얘기했다.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 때였다.
"이모 저희 1달 전 통보 안 받았으니까 신고해요"
아직 잘 모르는 모든 애기들을 위해, 1달 전에 해고 통보를 받지 않으면 해고 예보 수당을 노동청에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수당으로 신청할 수도 있고 구제신청을 할 수도 있다는 것! 3N 년 동안 이런 것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올해, 뱀의 해, 처음으로 노동청이라는 곳에 가서 나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챙기기 위해 신고를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의 손에는 60 평생 신고를 해 본 적 없는 주방 이모의 손까지 더해졌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가는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의 권리를 챙긴다는 것인 걸까. 권리를 챙기는 것도 좋지만 그냥 짓밟는 사람만 없어도 좋을 텐데. 에휴.
쨋든 알바는 그만 나오라고 통보한 시간이 되었고 일은 그만하게 되었다. 해고 통보 1달 이내에 신고접수를 해야 한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으리으리한 노동청 건물을 들어가 노무사와 상담을 하고 접수를 한다.
신고를 한다는 것은 꽤 무서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신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모님도 언니들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이것이 무슨 장기전이 되거나 나에게 무슨 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한국을 흔드는 대기업도 아닌데 무슨"이라며 부모님을 진정시켰지만 속으로는 후들후들 떨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신고하자고 했는데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정서가 접수되자 부장님과 노동청과 대화가 오가고 부장님과 다시 이야기를 했다. 전화가 왔을 때 심장이 어찌나 떨리던지. 노동청이랑 전화할 때도, 부장님이랑 전화할 때도, 혹시나 내가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이러니한 생각들이 들었다. 내가 왜 무서운 걸까.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기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까. 이게 바로 길들여진다는 것일까. 젠장. 그러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살 떨리는 일이 된다니, 참 예상 못한 일이다.
다행히 부장님이 진정서 접수에 대한 업장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는 점을 대표에게 잘 이야기하고 설득해 주셨다. 그 결과 2주 치의 월급을 받는 것으로 진정을 하고 노동청의 진정은 취하했다. 그리고 알바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모도 이에 동의했고 우리는 약속대로 2주 치의 월급을 받고 물러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나의 권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그냥 넘어갔다면 나는 또다시 가난에 허덕이며 어쩌지 고민하며 당근알바만 다시 주구장창 보고 있었겠지. 그리고 부장님이 잘 챙겨주셔서 다행이다. 만약 노동청이랑 사업장이랑 싸워야 한다고 하면 나는 정말 후달거렸을 테니까.
권리 챙기기. 올해 첫 레슨이다. 나의 권리는 내가 챙긴다. 너무 몰라서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물론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긴 했다).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좋게 말하면 해방, 나쁘게 말하면 다시 방랑의 시작.
알바에서의 낙하가 이루어졌다.
자, 이제 어디서 또 낙하해 볼까.
세상에 낙하할 곳은 천지삐깔 널려 있으니 어디서 또 뚝 뚝 떨어져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