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의 공중
가장 오랫동안 유영했던 공중은 어떤 공중이었을까. 공중을 어딘가 불안하고 불편한 곳으로 가정을 했을 때 내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끊임없이 떨어져 바닥이 보이지 않게 느껴지는 공중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그리고 지금은 또 그 공중의 어디쯤에 서 있을까.
나에게 지속적인 불안과 불편함을 안겨주는 공중은 외모다. 어렸을 때는 살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그 공중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아직도 땅에 발을 닿지 못한 것 같다.
어렸을 때 아주 통통한 아이였다. 귀엽게 말하면 토실토실, 객관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말하면 뚱뚱. 지금은 장난처럼 뒤돌아보면서 "나 어렸을 때 김정은 닮았었다, 귀엽지?"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놀림거리가 되고, 놀림거리가 되는 상황에 동조하며 함께 웃어댔다. 어린아이가 하는 사회생활이 뭐가 있나. 너는 나를 비난하고, 나는 너를 비난하고, 그게 웃기다면서 웃다 보면 서로 헐뜯긴 마음이 얼마큼 남겨진 지 모른 채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 웃긴 건 이런 경험들이 쌓이기 전이나 후에 주변에서 아무리 긍정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부정적인 이야기 하나가 들려오면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그게 먼 훗날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게 시작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속에 있었고, 그 속에는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어렸을 때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 자기 관리와 습관, 다양한 노력으로 완벽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원하는 모습을 만들었다, 지금도 진행 중이긴 하지만(평생 진행 중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완벽은 뭘까. 늘 완벽이란 단어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쓰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꼴이라니. 위선덩어리다. 그런데 내가 바라보는 완벽, 내가 바라는 모습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명확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내 공중은 더 끝도 없고 바닥이 안 보였던 건가.
잠시 본가에 내려가서 엄마가 처녀시절 입었던 옷들을 입으며 노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까지 관리가 잘 된 옷들을 입어보며 엄마는 자신이 가장 꾸미고 다녔던 시절을 회상했다.
“30대에는 삐딱 구두도 신고, 좀 추워도 견디면서 멋 내야지. 그때는 멋 낼 수 있는 시기야. ”
멋이라. 어렸을 때부터 뚱뚱해서 박스티로 뱃살을 가리기에 급급했던 아이. 커서는 연극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연습하는 데에 편안한 복장을 입고 다닌 아이. 30대가 되어서야 교정기를 한 아이. 나에게 멋은 늘 사치스러운 것. 너무 신경 쓰고 있음을 티 내서 보여주는 것. 나대는 것. 불편한 것 등으로 치부됐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랴. 노력한다고 뭐가 변하겠냐 얘기하며 나 자신을 가꾸는 것을 미뤄둔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러니까 내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나 자신을 내가 홀대하고 있음이 느껴지고, 내가 기분 좋게 예쁘게 다니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남들 신경 쓰고 (분명 그들은 나한테 관심도 없을 텐데) 살았을까. 젠장. 젠장!
호박에 줄 그으면 수박은 안 되겠지만 멋쟁이 호박이 될 수도 있거늘, 왜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거울을 보는 일 자체가, 나 스스로랑 친해지고 알아가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만의 매력이 각광받는 시대.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들은 스스로의 매력을 찾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투자했을까.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찾았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 공중 속에서 나의 다양한 모습들을 찾아봐야지.
다양한 변신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봐야지.
이 공중의 시간은 세일러문처럼 변신하는 시간!
그동안 어리고 어렸던 나야~
미안해 솔직하지 못했던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