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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랄 Oct 27. 2024

레위인의 변론-10

결말

# 우주력 1045년. 12월 1일


<사사>


"피고인 측, 최종 변론하세요."


판사가 말했다.


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랜만에 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거의 3주만에 열린 마지막 재판이다. 치라는 그동안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는지 뱃살도 없고, 팔 다리에 근육도 제법 붙었다. 무엇보다 예전의 붉은 색이 도는 갈색 단발 헤어스타일을 금발의 숏컷으로 바꾸고 안경 대신 콘텍트 렌즈를 낀 모습이다.


너무 달라졌다. 치라가 맞나ᆢ? 의심스러울 정도로.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은 것 같은데ᆢ 누굴까ᆢ


"재판장님, 사사는 아시다시피, 그녀가 혼인계약을 맺은, 그녀가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배우자인 사사진을 배신하고 저버렸습니다. 그 결과 사사진은 화성의 불량배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사사는 범죄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사사진의 시신을 훼손하고 우주 각처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러나 사사는 사사진을 정말로 사랑하였으며, 진실로 사사진을 죽일 의도가 없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입니다. 낯선 행성에서 무서운 불량배들을 만나, 순간적으로 판단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녀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저지른 일이었음은 우리가 정황적 근거에 의해  수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사사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첩을 잃고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한 어리석은 인간이었음을 충분히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숨가쁜 마지막 변론을 마친 뒤, 치라가 내 옆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녀의 차분한 걸음걸이가 자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아주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귓속말을 했다.


"사사,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세요. 그것만이 당신의 형량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입니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돼ᆢ난 무죄야! 사사진은 사람이 아닌데, 대체 내가 뭘 했다는 거야? 내가 주인인데, 누구에게 사과하라는 거야?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던 나는 순간 눈살을 찌뿌리며 코를 틀어쥐었다.


"그런데ᆢ 뭐지? 이 냄새ᆢ설마, 치라, 당신 담배 피워요?"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나도 모르게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담배잎은 우주에서 멸종한 지 벌써 100년 가까이 됐다. 게다가 이 우주법정에는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동식물도 들여올 수 없다. 심지어 아주 바짝 말린 잎이라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롤리타바코.


지구의 마지막 담배잎에서 직접 추출한,  유일무이한 마지막 향수라고 그 조향사는 내게 말했었다. 내가 사사진에게만 뿌려주었던ᆢ


"치라? 당신 누구야? 대체.."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ᆢ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치라가 다시한 번 내 귀에 속삭였다.


"한 가지 더, 그 때 플랫이 보낸 동영상은ᆢ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가짜였어요. 내 옆에 있던 여자는 GPT101로 만든, 지구의 미인대회 출신 여성 50명의 조합에 불과하죠. 플랫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잊었나요? 당신은ᆢ정말 바보인데다가 무식해서 사악하기까지 하군요."


사사진. 네가ᆢ어떻게ᆢ

넌ᆢ 그때 분명히ᆢ 완전히 고장났었는데ᆢ!

너는ᆢ 조각으로 나뉘어서ᆢ




# 우주력 1045년 12월 12일


<치라>


사사에게 마지막 선고가 내려졌다.


"선고의 내용본 재판관 뿐만 아니라,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의 여덟 행성 대표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의논하여 만장일치로 결정한 사항임을 알립니다."


판사가 주문을 읽었다. 방청객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주문. 인간 여성 사사는 자신의 안드로이드 첩 사사진을 성폭행의 범죄에 노출시켜 결국 사망에 이르도록 하였으며, 그 시신을 수습하고 범죄의 정도를 알리는 과정에서 생명체의 존엄을 훼손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


비록 안드로이드가 사람과 다르다 하나 피고인 측 변호사가 제시한 증거에 따르면 안드로이드 사사진은 명백히 인간과 같은 이성과 감정을 가진 생명체로 판단되며 단순한 기계나 물건이 아니므로 사사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사사 본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끝까지 반성하지 아니하였고 유가족인 산드라 박사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이에 본 법정은 사사에게 다음과 같이 구형한다.


사사, 아래를 내려다 보세요."


투명 유리가 깔린 법정 바닥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금성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둥그렇고 신비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불과 같은 행성의 모습이다.


판사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사사. 당신에게 가석방 없는 금성의 불감옥 1000년 형을 선고합니다. "


바닥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맨홀 뚜껑과 같은 원의 가운데 구멍이 뚫려 점점 커진다. 지옥의 헬게이트가 열리는 것이다. 붉게 타오르는 금성의 표면과 대조하여 사사의 얼굴은 정 반대로 하얗다 못해 푸르러진다. 그녀가 시체와 같이 굳어간다ᆢ


사사. 안드로이드였던 시절의 내게도 감정이 있었다면, 난 당신을 '좋아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저, 당신의 잘못된 선택이 안타까울 뿐ᆢ




# 지구력, 기원전 1000년


 <사사기 19장 26절, 그 이후 새로 쓰인 말씀의 기록>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려 하매...


레위인의 눈 속에서 시체와 같이 굳어가는 사사의 얼굴과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는 사사의 몸. 그 심연에는 활활 타오르는 무저갱의 지옥이 풍경처럼 그려진다.


그때에 레위 사람은 곧 그의 첩을 잡은 손을 놓고 말하기를 무서운 환영을 보았다 하며 신께서 내게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으셨도다 하였더라


그러자 그의 첩이 나서 우리가 다같이 불량배들을 쫓아버릴 방도를 궁리하자 하니 노인이 이르기를 그들은 힘센 젊은이들 일곱이요 우리는 늙고 병든 나의 어린 딸과 당신의 주인인 레위 사람과 그의 종인 당신 뿐이요 어찌 그들을 상대하리라 하고 말하니


첩이 설득하기를 우리가 비록 숫자가 적으나 올바른 일에 힘을 합치면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지 않으랴 하며 곧 부엌으로 가 솥을 걸고 물을 끓이니 노인의 딸도 나서 질그릇이며 놋그릇을 모두 모아 창문을 열고 불량배들에게 던지니라


끓인 물을 그들의 머리 위로 붓고 가재도구를 던지며 대항하니 그들이 머리와 몸에서 피를 보았고 마침내 욕설을 하며 물러가니라


레위인이 이를 보고 탄식하며 내 어찌 나의 사랑하는 첩과 우리를 대접해 준 주인의 딸을 불량배들에게 내줄 생각을 했으랴 주님께서 내게 큰 깨달음을 주셨노라 하였다.


날이 밝자 그들은 노인이 권하나 더 유숙할 것을 사양하고 기브아를 떠나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가니 이로써 그 후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을'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도, 보여지지도, 기록되지도 않았더라



                                                                                                           -레위인의 변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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