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남녀 관계의 유일한 언어는

[단편소설 연재] < 중독되었다 > 유정 이숙한

by 유정 이숙한

난 성격이 느긋한 사람인데 서두른 감이 있다. 얼굴을 두어 번 본 사람에게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많은 여자들을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딱 보면 어떤 부류의 여자인지 느낌이 온다. 밭에서 만난 여자는 꽤 괜찮은 여자다. 처음 본 날 무거운 약통을 짊어진 모습이 딱해 보여 물었다.

“이런 일은 남자가 하는 건데 남편 뒀다 뭐에 쓰려고 무거운 약통을 연약한 여자가 짊어졌어요?”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이런 일은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내 짐작대로 여자의 남편은 부재중이다.


여자가 제초제를 뿌리고 갔으니 밭에 와서 잡초들이 죽었는지 유심히 살펴보겠지? 전화국 담장을 타고 올라간 잡초들이 누렇게 타 간다. 쑥대밭도 까맣게 타고 잎이 기다란 초록들도 기가 꺾여 짙은 갈색이 되었다.


여자에게 부재중 전화가 왔다. 가슴이 떨렸다. 여자에게 전화했는데 아니라고 잡아뗀다. 이건 내 짐작과 다른데..? 연정이 내 전화를 저장하지 않은 걸까? 저녁 무렵 연정에게 전화가 왔다. 밭의 풀 속에 숨어있던 자재들을 실어가기로 약속했다. 여자는 땅벌에 물린 상처가 나았는지 안부를 묻는다.


세 번째 만남이 약속된 날. 내가 도착하고 5분 뒤에 그녀가 도착했다. 여자가 땅벌에 물린 상처를 물었다. 난 가려움증으로 엄청 고생했다고 말했다.

"내가 연정 씨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점심을 살게요?"

연정은 고개를 흔쾌히 승낙했다. 연정의 차는 세워 두고 내 차에 같이 타고 갔다. 유유자적 저속으로 운행했다. 궁평항 초입에 있는 식당에서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나와 느릿한 걸음으로 걸었다. 궁평항 전망대를 지나 포구까지 걸었다. 강태공들이 고등어를 낚고 있었다.



연정은 걸음이 나보다 빠르다. 성격이 급한 모양이다. 발걸음 속도를 늘려 그녀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바다 위 허공에 만들어진 테크 길을 걸었다. 우측 선착장에는 정박된 어선들이 얽기 설기 모여있다. 포구에서 전망대카페 아래 길을 걸으며 연정은 사생활을 주절주절 쏟아놓는다. 나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천천히 걸었는데 주차장까지 오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연정이 말했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더니 기분이 상쾌하네요. 제가 오늘 말이 많았지요? 잘 먹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최대한 천천히 왔는데 벌써 도착했네! 말할 사람 없으면 동생에게 전화를 자주 드려도 되나?”


연정은 의리 없이 떠난 사람 때문에, 몇 달 동안 눈물로 슬픔을 계워냈다고 고백한다. 날 보고 어쩌라고?

"같이 있을 땐 미울 때가 많았는데 떠나고 보니 남편의 빈자리가 크더군요. 오빠는 친정아버지 닮았어요!"

세 번째 보는 얼굴인데 내 모습 어딘가에 친정아버지의 얼굴 모습이 배어 있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중학교 문턱도 가보지 않은 내게 끌림이 있는 모양이다. 연정은 내가 트럭을 몰고 다니는 모습이 진실해 보인다고 한다. 배웠네 하며 얼굴에 가면을 쓴 사람이 많은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연정이 이유 없이 좋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지만 아무리 봐도 괜찮은 여자다. 숱한 여자들을 만나 봤지만 대부분 속물들이었다. 남자들이 돈을 많이 써주기를 바라는 것이 비슷했다. 내가 만난 여자 90%가 나와 잠자리를 하면 매달린다.

파란만장한 내 인생! 바람처럼 스친 많은 여자들.. 기억에 남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연정은 차원이 달랐다.


반 평생 넘게 살아오며 좋아하는 취미가 뭔지, 뭘 좋아하는지, 특기가 뭔지, 꿈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섬마을에 태어나서 가난해서 어린 시절 늘 배가 고팠다. 그 배를 채우기 위해 살았다. 먹기 위해 산 거 같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무작정 서울에 갔다.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다. 배는 채워야 했으니까.. 어쩌다 서울에서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되었다. 윗사람의 지시대로 일하며 버릇처럼 열심히 살았다. 난 입으로 하는 말보다 몸짓 언어에 능한 남자다. 남녀 관계는 섹스가 유일한 소통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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