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유 없이 좋다

[단편소설 연재] < 중독되었다 > 유정 이숙한

by 유정 이숙한

약속한 금요일이다. 약속된 시간 5분 전에 밭으로 갔다. 5분 후 여자가 도착했다. 여자는 차를 세우고 성큼 밭으로 들어왔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폐기물들이 담긴 마대를 번갈아 보았다. 지게차가 도착했다. 지게차는 밭에 있는 흄관을 고리에 걸더니 내간다. 여자가 급히 따라나서며 흄관을 보며

“그 흄관 새것이라 아까운데 저기 입구에 놓아주세요?”

여자의 말에 내가 쐐기를 박았다.

“나중에 말 바꾸기 없습니다?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지게차가 흄관을 입구로 옮기고 사라졌다.


폐기물이 담긴 마대를 차에 실기 시작했다. 여자가 거들었다. 여자에게 의자에 앉아 구경하라고 했다.

여자는 바닥이 울퉁불퉁한 곳에 의자를 놓고 앉으면서 넘어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가만히 두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여자다. 여자는 몸을 일으켜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재들을 주워 전달했다.

토막 난 자재들과 사용하지 않은 자재들이 차에 속속 실렸다. 여자의 밭을 떠나 아내의 밭에 자재들을 주섬주섬 내려놓았다. 두어 번 실어 나르니 어느 정도 치워졌다. 시커먼 기름이 엉겨있는 물뿌리개를 차에 싣다가

땅벌의 공격을 받았다. 벌에 쏘인 상처가 부르트고 가렵고 괴로웠다. 여자는 물약을 가져오더니 내 팔에 발라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손길이다. 가슴속에서 이상야릇한 감정이 일렁인다.


여자는 자재 싣는 것을 거들어주며 그곳에 있는 폐 장롱을 부숴달라고 했다. 약속대로 비걱거리는 장롱을 발로 뻥뻥 차서 그 자리에 눕혔다. 여자가 내게 "대단하다, 힘이 장사”라고 칭찬해 줬다. 내가 동생으로 보인다며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주민증을 보여줬는데 여자보다 대여섯 살 위였으니 꼼짝없이 오빠로 부르기로 했다. 불에 덴 다리의 흉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나 위암 수술받은 적 있어요. 다리에 흉터 있는 남자 싫지요?”

“흉터는 죽을병은 아니잖아요, 어쩌다 불이 난 거예요?”

“버너가 세는 줄 모르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펑’ 하더니 불꽃이 일더니 다리에 붙었는데 얼른 옷을 벗었는데도 다리가 데고 말았어요. 청주에 예쁜 집 있는데 구경하러 같이 갈래요?”


여자에게 예쁜 우리 집 사진을 보여줬다. 여자는 시력이 좋지 않은지 건성으로 보았다. 야릇한 흥분을 느낀다. 예쁜 얼굴도 몸매도 아닌데 여자로 보이는 걸까? 장롱 부순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여자가 폐기물을 싣는 것을 도와주어 일이 일찍 끝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여자에게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내 차가 앞서고 여자의 뒤에서 차를 몰고 따라왔다. 김치찌개를 잘하는 식당에 갔는데 문이 닫혔다. 근처 뷔페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밭으로 돌아왔다. 내 화물차에 실린 폐기물을 아내의 밭에 내렸다.


여자는 약물을 분무하고 새로 한 통을 타서 짊어지고 옆집 울타리를 감고 있는 잡초에게 분무했다. 30분쯤 지나 빈 차로 여자의 밭에 가서 남은 자재들을 실었다. 다 싣고 나자 여자에게 확인서를 써달라고 건네주었다. 여자는 자필로 쓴 확인서에 사인하고 내게 건네준다. 여자의 사인이 든 확인서를 받고 나니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일단 낚시하는 심정으로 말을 건넸다.

“우리 언제 또 얼굴을 보나? 친해졌는데 우리 악수나 한 번 해요.”

“전 이 밭에 자주 오니까 이웃에 사시니 자주 보겠지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확인서에 쓴 여자의 이름은 연정이었다. 다리 흉터를 보여주고 예쁜 집을 보여주었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지? 내 속마음은 그랬다. '저런 여자라면 그 집 안주인으로 적당하다'


다음 날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밭에 갔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뿌린 제초제가 효과가 있는지 쑥대도 주저앉고 초록도 고등 색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죽은 잡초 사이에 숨어있던 자재들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고 춤을 출 거 같았다. 이제 연정을 만나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여자가 밭에 나오면 내게 전화를 할 거라고 확신한다.





keyword
이전 07화7화. 돈 냄새를 풍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