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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머리와 내 별명

[에세이] 유정 이숙한

by 유정 이숙한

7살쯤 되었던 집에서 2킬로쯤 떨어진 예배당에 다녔다.

작은 예배당을 헐고 새로 짓느라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릴 때였다.


넓은 평야가 펼쳐진 외진 시골 마을인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이었다. 버스를 타려면 2킬로쯤 걸어가야 한다.


팔봉면사무소나 익산군청이 4킬로쯤 떨어졌고 시장도 4킬로 떨어진 동네라

이발소나 미장원, 목욕탕이 멀기 때문에 집에서 이발기(일명 바리캉)로

머리를 잘랐다. 할머니는 쪽진 머리를 비녀로 꽃으셨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오빠들 머리를 잘라주셨다.

내 머리가 길어 군용 의자에 앉아 목에 천을 두르고 양지 끝에 앉았다.

바리캉이 쓱싹쓱싹 머리를 자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머리를 다 자르고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작은 빗자루로 목을 털어냈다.

어떻게 잘라졌나 거울을 보았다.

낯익은 사내아이가 거울 속에서 빤히 바라본다.

아버지에게 남자 상고머리로 잘랐다고 투덜거리자,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인정하셨지만. 자른 머리카락을 도로 붙일 수 없으니 자라면 된다고 한다.


앞 머리는 조금 길게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추켜올려 깎은 남자 상고머리였다.

현대는 스포츠머리라고 부른다. 오빠들을 자주 깎아주다 보니 남자 상고머리가

손에 익으셨던 모양이다.


1미터가 채 되지 않은 작은 키의 영락없는 사내아이였다.

예배당에 가야 하는데 창피해서 큰 걱정이었다.

엄마가 보기에 영락없는 사내아이니 안 돼 보였는지 추울 때 쓰는 방울 달린

초록색 벙거지를 내주며 예배당에 갈 때 머리에 쓰고 가라고 했다. 초록색 모자 속에 상고머리가 감쪽같이 숨겨졌고 계집아이로 보였다.

당당하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일학교 반사가 모자를 쓴 내 모습을 보더니 예배를 드릴 땐

모자를 벗는 거라며 내 모자를 벗겼다. 아뿔싸!


머리 때문에 어찌나 창피하던지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창피한 것보다 충격이었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주일학교에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간 날이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내가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울 아버지는 이 씨이고 엄마는 장 씨인데 누구의 성을 붙여 이름을 말하는 거야?"


라고 물었더니 일곱 살 먹은 여자친구 왈

"엄마 성을 따라서 이름을 붙이는 거야."


그 애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일제 앞잡이를 했다며, 동리 사람들에게 얻어맞아

골병이 들어 돌아가셨다는데, 그래서 그 애가 몰랐던 걸까,


요즘 아이들은 네 살만 먹어도 성과 이름을 외우는데 답답한 일곱 살이다.

그때부터 예배당에서의 내 별명이 장숙한이 되었다.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숙한아, 당연히 아버지 성을 따르는 거지? 엄마 성을 따르고 싶었어?"

"엄마, 내가 몰라서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엄마 성을 붙이는 거라고 했어."


어려서 말을 배울 때 용인 이 씨 **자손이라고 할아버지가 귀가 닳도록 말해 주었건만

성과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을 몰랐으니, 그런 것도 모르는 일곱 살이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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