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연재 ] < 모태솔로의 사랑이야기 > 유정 이숙한
지난밤 잠을 잘 잔 탓인지 머리가 맑아진 그는 화투판의 일원이었다. 홍단에 초단, 쓰리 고, 피가 열두 장이라 양쪽 다 피박이다. 홍단 3점+ 초단 3점 × 2를 곱해(쓰리 고) 18점 × 피 박 2점 36점. 1점에 오천 원이라 18만 원을 땄다. 오십만 원, 육십만 원이 들어왔다 나갔다 춤을 춘다. 도깨비 춤 장단에 맞춰 북 치는 고수가 된 그가 침을 삼키더니
- 이거 원 갈증이 나서. 1점에 십만 원은 해야지?
시작할 땐 앞에 그득히 쌓여있던 돈이 어디로 간 것일까, 오리무중이다. 돈의 행방을 찾아라! 가랑비에 젖은 건가, 사라진 돈의 행방을 모른다.
지루한 가을장마도 물러가고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Y시에서 집까지 차로 반 시간 거리인데 남의 나라에 온 근로자처럼 외롭고 허전하다. '이 나이 먹도록 뭘 하고 살았나', 괜스레 우울해지는 찬수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고 멀어지면 아쉬운 것이 돈이던가, 박 사장에게 전화만 오지 않았어도 정애를 찾아갔을 그인데… 원수 같은 돈은 온데간데없다. 이 또한 얄궂은 운명인가, 도깨비놀음에 고수 장단 추임새가 돈이던가 기운이 빠진다. 보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노름빛을 빌려준 자들이 그의 집 주변을 배회하며 기다리고 있을 건 자명한 일이다.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모텔비와 아침저녁 밥값이 한 달 오백만 원이면 족하다?
- 그렇다면 사천만 원의 행방은 어디로 간 걸까?
1점에 오천 원짜리 화투판, 하룻밤에 백만 원, 이백만 원이 나가고 들어왔다? 고리 뗀돈이 눈덩이처럼 커졌으나 아무도 계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도깨비 살림이라더니 돈을 딴 날도 있고 잃은 날이 있는데, 많던 돈이 어디로 갔을까,
2003년 봄. 초저녁잠이 많은 건 집안 내력이다.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인다. 서희의 미소가 유령처럼 떠돈다. 깜박 졸았는데 동이 튼 것인지 동창이 밝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다. 정겨운 친구인 라디오를 켰다. 깜박 졸았는데 아침 7시면 조반 먹는 시간이다. 노모는 오랜 세월 밥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반찬이라야 마늘장아찌, 무짠지, 깻잎장아찌, 두부를 넣고 끓인 김칫국이 전부다. 찬수는 김칫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는다. 노모는 노총각 아들이 딱하다고 그 옆에서 쪼그리고 잠을 잔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던가, 칠순의 나이에도 밭을 매는 손이 번개 같다.
노모는 양아들 호준의 딸을 자주 업어준다. 호준은 피난길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평안도 고향을 떠나 흥남부두에서 아들 딸 업고 봇짐을 짊어지고 고생한 이야기를 노모는 호준에게 조곤조곤 들려준다.
한 여름 복날이 되면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강가 다리 아래에 모여 붕어 몇 마리와 메기, 쏘가리와 양수장 거센 물줄기 따라 날아든 민물 새우를 넣어 매운탕을 끓인다. 토종닭에 찹쌀과 마늘 넣고 백숙을 끓여 먹을 때도 있다. 영혼을 달래주는 낭만의 음악에 취해 주문한다. 이십 리 길 오토바이를 타고 온 커피아가씨. 보온병에 담은 물을 머그잔 위에 부어주고 작은 스푼으로 서너 번 저어 한 잔씩 건네준다. 커피 3잔을 주문하면 의례 커피 5잔이 온다.
커피 배달 아가씨가 주섬주섬 상을 차린다. 찬수와 일행은 마주 보고 앉아 소주잔을 나누며 노래방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며 뺑뺑이 춤을 춘다. 친한 척 커피아가씨의 어깨를 주무르고 음담패설을 던지는 것이 시골에 사는 순진한 시골 사내들과 그의 문화였다.
어느 날이었다. 형사처럼 날카롭게 생긴 사내가 그의 집 주위를 맴돌고 있다.
- 누구쇼? 왜, 남의 집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기야?
찬수가 화를 낼 때는 평안도 사투리가 툭 튀어나온다. 사내는 힐끗 돌아보더니 차를 타고 갔다. 해가 바꿔도 그의 인생은 다름이 없었다. 서희네 공장에서 배달를 하며 1년을 보냈다. 보고 싶은 서희 얼굴 보니 사는 것 같았는데 희망고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