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길 골목에 ‘라떼가 맛있는 집’이라고 쓰여있는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카페가 하나 있다. 지하철을 타러 가려면 항상 그 골목을 지나가야 돼서 그 카페 앞을 자주 지나간다.
그 카페 앞에는 길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문 앞에는 잘 수 있는 2개의 보금자리와 밥그릇이 있다. 아마 카페 주인께서 길 고양이들을 챙겨주시는 모양이다. 그 앞을 지나가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고양이를 찾는다. 자고 있으면 깰까 봐 혼자 조용히 팔만 뻗어 사진을 찍고 오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손을 뻗어 한번만 와주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지 늘 카페 앞에는 고양이를 만지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운대 바닷가에서도 공원 산책할 때도 그냥 길 가다가도 강아지, 고양이만 보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이유 없이 귀여운 마음만 들었다.
사실 이름도 없을 수도 있고 그저 주인이 없어 길을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길고양이인데 이름도 모르는 남의 강아지인데
문득 든 생각이
이름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강아지를 이유 없이 귀여워하고 예뻐하는데 이름도 있고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챙겨주는 사람도 있는 나는 ‘왜 예뻐하지 않는 걸까.’
어느 날은 길 고양이보다 날 예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러 순간에 스스로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중 스스로 하는 생각들이 스스로를 가장 하찮게 만든다.
항상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산다.
모두들 그렇겠지만
난 왜 사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은 항상 극단적이었다. 매번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정말 살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더욱 살고 있는 데에 의미를 찾지 못해서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면서까지 살아야 되는 거지 라는 생각까지 가게 되었다.
난 왜 삶에 감사하지 않은지 사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건 어려운 건가. 왜 태어나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지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너무나 싫고 나를 가장 하찮게 만드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질 여유를 없애버렸다. 생각을 할 여유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때론 이런 나의 모습이 영혼 없는 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 바엔 영혼 없는 혼으로 사는 게 나았다. 그래도 어쨌든 죽진 않고 있으니깐.
차마 가족들 가슴에 못을 박을 순 없으니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난데
때로는 삼키고
때로는 뱉고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인정하며
10번 중 10번을 이렇게 넘겼다.
그 결과 애초에 답을 내릴 수 없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는 걸 알았다. 수많은 철학자가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해 우린 여전히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찾고자 했다니 어차피 내가 풀 수 없는 거였어.
인정하고 답을 찾기를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혹시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찾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게 너무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끌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게 정답이 있는 문제는 맞는지
그저 지나가는 고양이, 강아지를 보는 그런 마음으로 나를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