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T Jul 17. 2023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스페이드 여왕]

알렉산드르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예술 감상의 목적이 공감과 공명이라면, 음악과 미술의 언어(소리, 형태와 색)는 문화적인 바탕과 신체의 다름으로 작은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문학의 경우만큼 커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비해 음악과 미술이 좀 더 인간 예술의 원초적인 바탕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벨탑의 파괴는 단순히 언어의 분화, 소통의 어려움 만을 야기했던 것은 아니다. 각각 분화된 언어는 시공간의 분리와 지속으로 그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번역 혹은 통역이 그 미묘한 간격을 메울 길은 거의 없을 듯 보인다. 푸시킨의 이 소설을 원문으로 이해했다면 어땠을까? 러시아 인의 정서가 묻어나고, 대화와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오만과 무료함 그리고 사랑을 더 잘 이해하고 느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되도록 리듬을 타도록 번역되었음을 의심하지 않고, 나의 독서 역시 번역가의 리듬을 따라가고자 노력했지만, 난 오네긴의 오만과 권태를, 또 타티아나의 절망과 사랑을 얼마나 느낄 수 있었을까? 의심이 든다. 영화 [오네긴] 속 뛰어가는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랄프 파인즈의 나른하고 거만한 시선과 리브 타일러의 머뭇거리는 떨림이 내 독서의 부족함을 보완했다. 


2023년 7월 17일 [대위의 딸]

두 개의 결론을 제시한다. 기존의 결론 외, 부록의 형태로 다른 결론을 보여준다. 부록의 상황이 좀 더 현실적이며, 주인공들의 의지를 통해 행복한 결말을 가져간다는 측면에서 더 바람직하고 소설적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기존의 결론은 서슬 퍼런 국왕의 검열에 대한 푸시킨의 타협으로 보인다. 행복한 결말을 여왕(국왕)의 은총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연성’이 극대화되었다. 그러면서 수미상관, 혹은 반복의 울림을 더했다. 푸가쵸프의 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그리뇨프와 푸가쵸프의 우연한 만남과 인연은 극을 끌고 가는 주된 서사다. 두 인물의 우정과 은혜는 결론 부분에서 마리야와 여왕의 우연한 만남과 은총으로 반복/재현된다. 그리뇨프와 푸가쵸프의 우연이 소설을 위한 정당한 장치라면 마리야와 여왕의 우연은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졸속한 장치처럼 보인다. 갑자기 모든 사건은 여왕의 은총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마치 두 개의 커다란 우연의 기둥이 서 있는 느낌이다. 그 우연은 동등한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면 푸가쵸프가 그리뇨프에 주는 보답과 은총은 여왕의 그것과 동등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대위의 딸]에서 푸시킨은 확실히 푸가쵸프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스페이드 여왕]

마치 ‘애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강한 집착과 약간의 공포로 그 둘은 맞닿아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나이의 두 사람은 비슷한 감정을 미국과 러시아에서 공유하고 있다. [스페이드 여왕]에서의 병적인 집착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이전글 거짓말 논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