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느리게 내리는 눈이 사람의 얼굴에 떨어진다. 주위의 소란을 삼켜버린 눈의 결정이 죽은 이의 얼굴 위로 쌓인다. 눈은 무수한 순환을 반복하며 현재 은선과 경하의 기억 속에 서늘한 느낌으로 살아난다. 몰아치는 눈폭풍과 조용히 내리는 눈이 대비되고, 과거 죽은 자의 얼굴에 쌓이던 눈과 현재의 눈이 겹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추모의 시간이고, 위무의 시간이며, 작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치유의 시간은 아니다. 눈은 조용히 상처를 덮을 뿐이다.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아래에서 상처엔 딱지가 생긴다. 고통의 딱지가 떼어져도 흉터는 남는다. 그만큼 작별은 힘든 것이다.
치매
과거를 환기하는 장치. 은선 어머니의 치매는 43의 고통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은선 어머니가 삼키며 살아온 고통의 시간은 봉합 수술한 손가락의 피 응고를 막기 위해 3분마다 찔러야 하는 바늘이 주는 고통 같은 것이다. 이렇게 지속된 고통의 기억이 덩어리 져 치매로 태어난다.
통나무(검은 나무)
‘베를린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의 콘크리트 기둥과 유사하다. 묘비 같은 아흔아홉 개의 검은 기둥. 소설가 경하에게는 작업동안 돋아난 518의 기억이지만, 은선에게는 43의 현실 기억으로 전이된다. 하나하나의 기둥은 희생자들을 상징하고, 꿈을 통해, 기억을 통해 살아난다. 그래서 은선이 시작하는 ‘검은 나무 프로젝트’는 은선 나름대로 고통의 기억과 작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림자
상여를 앞장서는 만장의 펄럭임 같은 것. 촛불을 통해 비치는 검은 그림자와 인터뷰 장면에서 회벽에 일렁이는 음영은 어둠에 갇힌 영혼이다. 작가는 그림자, 새, 검은 나무를 통해 계속하여 죽은 자들을 소환한다. 촛불을 통해 인터뷰를 통해 기억의 고통은 소환된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새
사람이다. 통나무가 죽은 사람에 대한 은유라면 새는 산 사람이고, 경하의 손등에 가벼운 무게감을 일으키는 영혼의 애처로운 가벼움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새는 경하나 은선처럼 죽었지만 살아나는 환상을 통해 기억 속에 살아있다.
꿈(악몽)
고통의 환기 장치. 반복적으로 꾸는 꿈은 고통의 기억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것이다. 경하는 ‘검은 나무 프로젝트’를 취소하며 마침내 518과의 작별을 이룬 듯하지만, 당사자인 은선 어머니의 악몽은 실톱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치매로 터져 버린 듯하다.
작별
[작별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하게도 작별의 과정이다. 학살의 기억이 아픔으로 덮치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과정이다. 이것은 최소한 고통의 기억과 타협하는 첫 번째 ‘맺음’ 일지 모르겠다. 나는 이 맺음이 몇 차로 이어질지 모른다. 출처를 잊었지만…, 어느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해 식사 때 밥을 같이 준비한다고 한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 행위는 계속되고, 마침내 어느 누구의 기억 속에도 그 사람이 없을 때 더 이상 식사를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작별의 과정이고, 작별을 위한 의식이다. 우리는 과거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서 최선의 작별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단절과 헤어짐과는 다르며, 고통의 기억이 눈에 덮이고, 딱지가 지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고통과 위무와 함께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느냐’는 잔혹한 말로 또 다른 폭력을 가하며 말라가던 상처를 후비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 [밀양]에서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해?’라며 울부짖던 전도연의 대사가 생각난다. 기억의 고통은 시간이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 강제로 끊어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