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의 권위와 신성함은 가톨릭 사재가 침전하는 의식에서 나오고, 일요일마다 성경을 끼고 교회로 향하는 신도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탁발을 하거나, 공양을 깨끗이 비우는 행위 속에는 부처의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있다. 신은 마음속에만 있지 않다. 선조들이 마련한 의식의 틀(法) 속에 있는 것이다. 앞서 현호정 작가의 장난기 가득하지만 동시에 의미 충만한 형식에 대해 언급했던 것처럼 [사탄탱고]만의 분위기를 만드는 특별한 형식이 소설에도 존재한다.
[사탄탱고]는 부와 장의 구분만 있을 뿐 문단의 구분은 없다. 독서는 굉장히 묵직하게 위장을 뻐근하게 팽창하며 내려간다. 그래서 이야기는 그(앞 독후감의 ‘그’)의 꿈으로 밀려갔던 것이다. 문단이 없음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무게를 싣고, 그들의 비애와 걱정, 불안의 감정은 젖은 솜처럼 상황을 다시 짓누르게 만든다. 또 그들의 불안은 문단의 없음으로 인하여 희망조차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희망은 위로 향하지 못하고, 아래로 당겨지게 되는 것이다. 차르다시의 프러쉬는 금세 꺾여버리고, 음울한 비탄으로 다시 잠기고, 비탄은 거미줄이라는 장치를 통해 집단으로 포섭되어 가라앉는다.
문단의 없음이 전체에 해당된다면 ‘무시된 띄어쓰기’는 2부의 두 번째 장 말미에 펼쳐진다. 비를 피하고 이동의 피곤함을 해소하고자 들어간 폐허가 된 저택. 이곳에서 우리의 등장인물들은 경쾌한 듯하지만, 희망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시시덕거리며 잠이 드는데, 점점 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들의 꿈속 이야기가 부분 부분 ‘띄어쓰기 없이’ 진행된다. 치진 몸으로 인해 가물거리며 빠져드는 잠과 피어나는 꿈의 표현에서 띄어쓰기는 일부러 무시된다. 이것은 불안과 희망을 섞어버리는 혼란이다. 라슬로는 이런 혼란을 통해 그들을 희망에서 다시 불안으로 잠재우려 했거나, 갑자기 등장하는 이리마이시(희망)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 무시된 띄어쓰기는 번역 출판사의 단순한 편집 실수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