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百의 그림자] 황정은

by YT

처음엔 스치듯 ‘白의 그림자’로 읽었다. 부족한 한문 실력 탓이다. 밝은 흰색에도 그림자는 검게 드리운다. 맑은 순수에도 그림자는 있고, 좋은 의도 속에도 어두운 구석은 항상 존재한다. – 소설은 ‘백색폭력’에 대한 것일까? 선량한 사람의 좋은 의도 역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일까? 百을 白으로 잘못 꿴 나의 상상은 전형적인 고발문학으로 치달렸다. 그리고 ‘흰색의 그림자’가 주는 미적인 색의 대비는 나의 상상을 화려한 환상으로 바꿔 놓았다. – 하지만 나는 완전히 틀렸다. 나만의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百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많은 그림자의 모습을 ‘백개의 그림자’로 표현한 것이다. 독서 내내 그림자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처음엔 (百과 白의 혼동처럼) ‘죽음의 그림자’라는 상투적인 연상으로 인해 단순하게 ‘죽음’을 떠올렸다. 그림자의 일어남이 종종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죽음 자체는 아니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무엇’으로 여겨졌고, 또 이것은 사랑으로(?) 다룰 수 있다는 면에서 개인의 통제를 벋어 나는 죽음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소설 속에서 표현한 작가의 단어들을 빌어보면 그림자는 ‘불안, 고통, 공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불안, 고통 그리고 공허는 개인의 원안에 머물 때, 일어나고, 커지며, 덮쳐오고, 죽음으로 발전하지만, 은교와 무재처럼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고, 사랑할 때 그림자의 일어섬은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여리다. 담백한 대화체의 문장에서 선선한 바람이 통하는 상쾌함이 있지만, 너무나 개인적이다. 어차피 모여 살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사회/집단 속에서 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어떨까? 해결방안의 모색은 소설 속 작가의 설정에 그 가능성이 있다. 그림자는 보이는 것이고, 발전의 단계를 가진다. 끝부분이 일어서 팔랑이는 그림자도 있고, 사람을 휘감고 무게로 짓누르는 그림자도 있다. 그림자는 우리 모두의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면 그 부담을 덜어줄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타인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말 것을, 관심과 연결된 감정선의 부드러움이 그림자의 일어섬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내 작은 제안이 또 다른 폭력이 아니길 바란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