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소설은 그의 잠으로 밀려왔다. 그럴 때면 현실과 소설은 그의 꿈에서 버무려지고, 꿈자리는 사나웠다. 2부 두 번째 장을 읽고 잠이 들었다. 희망의 행진에 스멀스멀 염려와 불안의 가능성이 졸음과 같이 밀려들던 장. 이야기는 그의 꿈속에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때때로 꿈의 자각인 의식의 쐐기가 박히며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다. 등장인물의 걱정과 불안은 그에게 전이되었고, 갑갑함이 그를 현실로 밀어내려 했다. 잠은 날아갔지만 꿈에서 밀려난 덕분에 그는 걱정과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리미아시가 나타날까? 그들의 비참함에서 피어난 의심스러운 희망은 그들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옴짝달싹할 수 없는 꿈의 답답함에서 벋어 났지만, 이야기의 찌꺼기는 여전히 남아 그를 멍한 상태로 만들었다.
소설의 1부는 등장인물 각각의 비참함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리미아시의 부활과 미래에 대한 기대의 가능성으로 모아진다. 그는 이 1부의 모아짐(술집으로)이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앞둔 열두 제자들의 구체적인 희망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거나, 고도를 기다리며 감정의 증폭을 드러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리미아시의 소식은 그들 각자에게 개인적인 희망의 부활을 의미했다. 그는 최후의 만찬이 묘사된 마태복음 26장과 요한복음 13장을 다시 읽으며, 예수의 도착 전 제자들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그린 것이 아닐까 추정했지만, 성경에서는 역시나, 인간적인 고뇌와 희망의 흥분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는 완벽한 신의 행위와 말씀에 맞춰져 있을 뿐이었다.
또, 그들의 불안과 기대는 케르케시의 ‘차르다시’ 아코디언 연주와 집단 춤으로 맺어지는데 이 광적인 술과 춤의 향연은 모든 사람들을 포획하는 잠과 거미줄의 습격으로 진정된다. 이것이 1부의 마지막 장면이다. 각자의 비참함과 불안은 이리미아시의 소식과 함께 희망으로 터지며 묵직한 ‘차르다시’ 선율로 마감한다. 어쩌면 차르다시의 비애와 밝음의 변주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묘사와 많이 닮아있다. 바이올린, 아코디언, 멜로디언, 피아노, 첼로, 심지어 가야금과 아쟁 버전을 찾아들으며 그는 실제 소설 속 아코디언 차르다시 연주가 소설의 분위기와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바이올린은 경쾌한 뒷부분(프러쉬)은 잘 표현하지만, 앞부분(러쓔)에선 너무 인간적인 애잔함만을 표현할 뿐이다. 하지만 아코디언의 도입부는 파이프 오르간의 음색을 느끼게 하며 보다 종교적이고 웅장하다. 한동안 그는 머릿속에 담은 소설의 이야기에 차르다시의 음색을 입혔다. 웅장함과 경쾌함, 밝음과 암울함의 두 번 변주는 소설 속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 스토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장치인 것이다.
읽기를 마치고 그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체념과 불안–희망–다시 좌절’의 흐름을 꽉 찬 바디감으로 묵직하게 그리는 것 같았는데, 라슬로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시작 부분과 물리면서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라슬로 자신의 화신인 의사를 통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허구와 환상의 세계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1부의 관청 장면과 2부의 서기 부분에 대한 해석도 필요했다. 1부의 관청장면은 정치적인 의미(공산주의)로 해석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2부의 보고서를 정제하는 ‘서기’ 장면은 어떻게 해석할지 난감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 제목으로 돌아왔다. [사탄탱고]. 이 소설은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지독한 지옥 속, 사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다. 이리미아시와 패트리너에게 지시를 내리는 대위와 이리미아시의 보고서를 타이핑하는 서기는 사탄세계의 관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관리들이 천사의 상징인 것과 유사하다. 라슬로는 [성]과 대비되는 지옥의 세상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의사가 창조한 원에 갇힌 인간 세상은 현실이기보다는 사탄의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폐허에 울리는 종소리는 사탄에 대한 예배를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을 바라볼 때, 그는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사탄탱고]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