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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생역전 Nov 17. 2022

힘 빼기의 힘

힘을 뺀 주먹이 강하다

친구와 맥주 한잔

최근 큰 실패를 맛보고 잘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맥주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일 핑계로 나가지 않았을 텐데 이럴 때일수록 사람이라도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어차피 책도 저자와 간접대화를 나누는 것 아니던가? 그 친구는 대학시절부터 취업 한 번 하지 않고 사업을 시작해 1인 법인을 일궈냈다. 슬럼프에 빠진 나에게 해답을 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적당히 근황 토크를 하던 중 친구가 물었다. "그래서 계획한 건 잘 돼가?" 한 달 전만 해도 뭘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을 텐데 내 목소리에 힘이 많이 빠졌다. 그래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공감과 위로는 물론, 사업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주었다. 친구는 지금의 나에게 꽤 괜찮은 일 같다며 사업 초창기 시절 커리어를 쌓기 위해 부업으로 하던 아이템을 소개해줬다.


냉정한 관점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주니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하락장에 만신창이가 돼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으니 경청하는 것이라도 노력해 봤다. 내 경험을 기반으로 전자책을 쓰고 있다는 말에 친구가 말했다. "일단 무언가 완성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데, 지금 너의 위치로는 사람들이 아얘 그 책에 관심조차 안 가질 수 있어. 내가 볼 때는 너무 무리하는 것보다 쉬운 일로 포트폴리오와 인지도를 먼저 쌓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실 나는 카피라이팅과 마케팅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었다. 때문에 부족한 커리어를 극복할 만큼 효과적인 판매글을 쓸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부족한 나라도 책을 잘 팔 수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친구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작가의 이력란에 쓸 거리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나쁠 것도 없으니 친구의 말에 더 집중해봤다.

누군가를 무리하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냥 즐겁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될 수 있어


친구는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강사로 활동한 경험을 말해줬다. 좋은 영화 모임을 대신 광고해주는 만 단위의 팔로워 계정을 이용한 것이다. 그 계정을 통해 홍보할 수 있는 자격요건은 모임 기획서를 제출해 운영자의 승인을 받아야만 얻을 수 있었다.


친구는 평소 칵테일과 커피에 관심이 많아 간단한 음료를 만들 줄 알았다. 그 재주와 영화를 결합해 모임을 기획했다. 버킷리스트라는 고전 명화에 고양이 똥으로 만든 루왁 커피가 등장한다. 친구는 영화가 끝나고 커피 향이 나는 칵테일을 제조해 참여자들에게 나눠주고 영화와 술에 담긴 내용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내용이 꽤 흥미로웠는지 친구는 모임장이 될 수 있었고 떨리는 첫 모임을 진행했다. 평일 저녁에 진행되는 모임 특성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고픈 직장인 위주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첫 모임의 성공을 위해 어색함을 풀 수 있는 간단한 레크리에이션과 아이스 브레이킹, 칵테일 재료는 최대한 좋은 것으로 준비했다. 그 결과 참여자들 반응이 너무 좋았고 고정멤버로 총 5번이나 연장 모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성공이었다.


친구는 모임의 성공 비결이 누군가에게 양질의 지식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즐길 거리를 색다르게 제공하고 사람들이 편하게 놀 수 있게 해 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칵테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바텐더 같은 전문가도 아니었다. 모임자들은 칵테일 타는 법에 매료된 것이 아니었다. 맛있는 술과 흥미로운 이야기,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친구의 모임에 끌렸던 것이었다.


"나는 무리하게 무언가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어, 그냥 서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을 뿐이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나도 그 속에서 즐겼을 뿐인데 돈까지 벌 수 있었어, 게다가 그 경험은 오프라인 모임장이라는 커리어가 돼서 아직까지도 다른 기획서에 나를 어필할 때 쓰고 있지 너도 힘을 좀 빼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


나는 투자와 자기 계발을 위해 사교 모임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내가 참여해본 것이라곤 투자, 사업 관련 강연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투자 관련 전자책, 투자 컨설팅 쪽으로 사업방향을 잡았다. 내 수준에 비해 높은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자 자책하게 됐고 외부 위협에도 여유롭게 대처하지 못했다. 너무 과도하게 힘을 준 것이 스스로를 슬럼프의 늪으로 빠뜨린 것 아닐까?


친구의 말 덕분에 새로운 아이디어도 하나 떠올랐다. '투자 실패 한탄 모임을 만들자' 나는 투자에 실패하고 나니 어딘가에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 투자로 80%나 손해 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털어놓는다. 그 때는 해결방법보다도 그냥 그렇게 말하고 나면 조금이나마 후련해지는 것 같아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예전에 직장동료들과 하던 대화도 생각난다. 출근 전날 밤 주식시장이 하락하고 나면 장난으로 동료가 보유한 주식이 떨어졌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있었다. 실컷 놀려놓고는 꼭 옆에 있는 다른 동료가 내 것도 떨어졌으니 별거 아니라 위로해준다. 나도 내 주식이 더 많이 떨어졌다고 하면 어느새 서로 손실율을 자랑하는 대화로 변질된다. 사람들에게 위기 극복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저 서로 후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이선균이 고민에 빠진 아이유에게 해준 말이다. 나의 마음가짐과 생각에 따라 상대방의 반응도 달라진다는 것. 나도 직장 생활중에 이 말에 공감할만한 일을 자주 겪었다. 사회초년생 때는 실수를 하거나 깜빡하고 마감을 지키지 못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고 내가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힌 것 같았다. 상사에 꾸지람에 고개를 숙이고 연신 죄송하다, 빨리 해결하겠다 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야근까지 했다. 그러고 나면 격려해주긴 커녕 남들은 나를 어리숙한 사람으로 봤다. 실수 많은 신입사원, 어쩔 줄 몰라하는 애송이 정도로 본 것 같다. 이후 내가 실수를 하면 더 크게 꾸짖었다. 야근을 하면 무능력해서 오래 앉아있는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직장생활에서는 진짜 능력보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다른 직장으로 이직한 후에는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초년생 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아~ 이거 안됐네요 금방 하면 되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했지만 어쩔 줄 몰라하는 태도는 절대 취하지 않았다. 마음가짐도 편하게 가졌다. 처음엔 나를 뻔뻔한 사람으로 보는 눈도 있었다. 하지만 편하게 반응하고 결국엔 해결하는 나를 보고는 사람들은 나를 여유롭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사실 초년생 때에 비해 그렇게 실력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큰 문제가 터져 야근을 할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실수를 해도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고 짚어만 주거 거나 그냥 문제가 조금 있으니 해결해 달라는 식으로 팩트만 전달했다. 야근을 하면 어쩜 그리 열심히 하냐고 응원해줬다.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내가 별거 아니다, 잘하고 있다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봐준다.

주식이 떨어져도 내가 아파하면 정말로 위축되고 다른 사람들이 안타깝게 본다. 그 동정에 나는 더 지친다.

자산 가격이 떨어졌으니 기회라 생각하고, 하락장을 젊을 때 겪어봤으니 좋은 경험 쌓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쩜 위기 속에서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지 나를 높이 평가한다.


나는 가르쳐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은 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보를 줘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꽤나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경직되어있으니 나에게 들이닥치는 위험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한 기준이 높으니 원하는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자책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태론 다른 이에게 편안한 느낌을 줄 수도 없다.

강연자가 긴장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질 높은 강의였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주식 한탄 모임은 얼마든지 편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도 덩달아 즐거울 것이다.

그런 내 모습에 사람들도 함께 즐거울 것이다.

부담감을 덜으니 스트레스가 줄었다.

나의 마이너스 계좌는 이제 사업 아이템으로 보인다.


힘을 뺀 주먹이 더 강하다

나는 첫 직장을 퇴사하면서 다이어트와 스트레스 해소 목적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복싱은 나의 인생 취미로 자리 잡아 지금 까지 3년째 계속하고 있다.


복싱에도 명언이 있다.

힘을 뺀 주먹이 더 강하다. 초심자일 때는 샌드백을 부술 것처럼 주먹을 마구 휘두른다. 내가 엄청 강한 것 같지만 샌드백은 이리저리 휘청이고 그 무게에 오히려 내가 고꾸라진다. 더 세게 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고 나면 관장님이 넌지시 알려준다. 어깨에 힘을 빼고 주먹을 던지듯이 날려야 해, 마지막 타격점에 닿는 그 순간에만 힘을 살짝 싣는 거야. 그게 더 강하고 빠른 KO펀치가 될 수 있어. 그 말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데는 1년이 넘게 걸렸다.


이제는 주먹을 날리면 샌드백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타격 소리는 엄청나다. 그에 이목이 집중될 때도 있다. 상대방에게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주먹을 날리면 동작이 커서 그런지 손쉽게 피한다. 그에 반해 힘을 빼고 여유롭게 날리면 주먹은 급소에 정확히 꽂히고 예상치 못한 속도에 상대방은 다운된다.


복싱을 하다 보면 주먹에 상처가 생긴다. 그것을 보며 아픔보다는 내가 잘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 훈장으로 여겼다.


이제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이너스 80% 손실을 봤지만 아직까지도 안 팔고 잘 버티고 있다. 파란불로 가득 찬 내 계좌는 손에 생긴 상처와 같다. 노력의 증거다. 나의 상처를 자랑스럽게 세상에 보여 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안될 때는 몸의 힘을 빼보자. 그게 어렵다면 쉬운 것부터 도전해 나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자. 그러고 나면 힘 빼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잔뜩 긴장해야 했던 일도 편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힘들 더라도 나의 마음가짐 하나만 바꾸면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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