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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y 24. 2024

75. 사람이 누구입니까?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75.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여, 주의 장막 안에 살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의 거룩한 산에 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올바르게 행동하고, 의를 행하며,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고, 혀로 헐뜯는 말을 하지 않으며,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동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으며, 타락한 사람을 경멸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을 존경하며, 손해를 봐도 맹세를 지키며,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많이 받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15편)  

~~~~~~~~~~~~~~~  성경말씀  ~~~~~~~~~~~~~

  참으로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어도 항상 마음이 뜨거워진다. 정말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사람들은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바쁘게들 살아간다.

  철없는 어린 시절에는 하루가 한 인생이듯이 생각이 짧았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놀까? 늘 오늘뿐이었다. 밤늦도록 집 밖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특히 요즘의 어린아이들을 보면, 참 불쌍한 생각이 많이 하게 된다. 훗날에 그렇게 부럽던 미국이란 나라에 갔을 때에, 정말 자유의 나라,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나라....... 그렇게 생각했던 미국 땅을 여행을 했을 때에....... 놀라운 것이 많았다. 첫째, 미국인들은 서로 마주치면 ‘헬로!’ 하고 미소를 보낸다. 반응이 없으면 매우 당황해한다. 둘째, 미국인들은 함부로 사람의 신체를 만지지 않는다. 부득이 지나쳐가야 할 때에는 ‘쏘리~’ 하고 말한다. 한국인 같으면, 모르는 아기를 보고 귀엽다고 만지작거린다. 지나쳐갈 때는 밀치고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셋째, 별 큰 도움도 아닌데 길을 비켜주었을 뿐인데, 미국인은 ‘땡큐!’하고 인사를 하고 간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YMCA에서 너무 운동을 많이 해서인지 샤워 중에 쓰러졌었다. 그때에 한 미국인이 직원에게 연락을 하고 계속 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깨어난 나에게 그는 계속 말했다. ‘오케이?’ 그렇게 확인을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또 한 가지, 앞서가던 미국인이 뒤에서 오는 나를 보고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 같으면 그냥 문이 닫히든 말든 갔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이라도 다는 아니다. 미국은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사는 나라이다 보니, 상당히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아동실종 사건, 총기사건 등은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일 년에 아동실종이 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보도를 보았다. 그리고 총기사건은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세계 어디나 인종차별은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은 인종차별에 골치를 앓고 있다. 한국에도 얼마나 인간차별이 심한가? 조선 5백 년에 역사에는 인종차별이라기보다는 신분차별이 심했다. 그래서인지 족보에 목숨을 걸 정도로 절대적이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양반들만이 족보가 있었고, 성(姓)씨가 있었다. 그러나 평민(천민)에게는 족보도, 성씨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식민지 초기에 양반제도를 폐지함으로써, 평민도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80년대에는 한반도에 아동실종이 많았다. 그래서 우유팩에나 곳곳에 실종아동에 대한 기사가 적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졌다. 듣기에는 사회의 불안감만 준다며 더 이상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동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간섭과 단속, 그리고 핸드폰까지 주면서 항상 확인을 하려고 하게 되었다. 그러니 아동들은 개인적 활동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미국도 역시 실종아동에 대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은 아동들에게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다. 그리고 집에 아이들만 있게 하거나 아이 혼자 돌아다니면 경찰이 단속을 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제는 미국은 자유의 나라,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다문화, 다민족이 혼재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가치관이 다양하며, 전통문화도 역시 다양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멀지 않아 미국처럼 다민족 사회가 되어가면서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들도 혼재하면서 미국처럼 치안문제가 복잡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단속하고 관리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한국은 육칠십 년도만 해도 경제적으로는 가난할지 몰라도 상당히 자유로운 환경이었다. 그러던 나라가 산업발달로 인해 외국인 일꾼들이 들어오면서 다문화, 다민족화로 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동실종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치관의 혼란과 이색적인 상황들에 접하게 되는 확률이 증가하게 되었고, 차츰 익숙해져 가게 되었다.

  이처럼 다문화, 다민족, 다인종의 산업시대에 있어서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나 사색을 하기보다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눈치작전의 생활이 더 급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가 우선시되는 사회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주 위험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에는 두려움이 앞서고, 군중 속이나 집단 소속에 민감한 태도와 행동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생이 어떻고, 철학보다는 유행을 좇고 대중적인 대화에 초점을 맞추려고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떻게 인생철학이니, 삶의 교훈이니, 이상적인 미래의 꿈이니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며, 아예 외면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런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시편 15편에 말씀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정도전의 이념인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이 씨 조선은 결국 십 퍼센트에 해당하는 양반 중심의 세상이 되어버렸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미지의 신대륙인 아메리칸 미국에서는 이제는 신앙의 자유가 제한받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벼락 오바마 정부시대에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못하게 하였고, 크리스마스추리도 제한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성차별에 대한 단속까지 하며, 성(性) 전환의 선택권까지 부모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법제도화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비이성적 사회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보다는 차별금지에 비중을 실어주어, 양성평등정책으로 인해 개인적 사생활에 강력한 간섭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엉뚱한 평등주의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유럽에도 마약처럼 확산되어 가면서 중독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시편 15편이 주는 메시지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부강한 나라로 키웠지만, 그는 항상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사람? 여호와의 산에 머물 사람? 그런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백성을 다스렸던 것이었다.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한 국가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사람의 갈등과 갈망은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도 역시 그랬었다. 쿠데타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 조선(명나라로부터 받은 국명)을 공자사상(孔子思想)으로 다스리다 보니 인본주의 사상으로 인간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유교의 제도적 나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참다운 인간, 진정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행동하고, 의를 행하며,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고, 혀로 헐뜯는 말을 하지 않으며,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동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으며, 타락한 사람을 경멸하고, …  손해를 봐도 맹세를 지키며,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많이 받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사는 세상, 국가와 개인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은 조금이나마 갈등과 갈망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그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거두어주실 것을 간청했듯이 말이다. 그때에 나그네는 열 명의 의인이 있다면, 아니 한 명의 의인이라고 있다면 심판을 중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간절함에 롯의 식구들만은 심판에서 살길을 열어주었다.

  이처럼 의인, 주의 장막에 거할 사람, 주의 산에 머물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인간의 갈등과 갈망의 혼란 속에서도 희망이 있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즉 의인이 있는 세상에는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뜻)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날씨가 좋은 날에 산에 오르면 만물들이 다 형통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 살 수는 없겠지만, 한 명이라도 의인이 존경받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참말로 살기 좋은 세상일 것이다. 꽃 한 송이의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듯이, 의인이 존경받는 세상엔 사람 사는 향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 안에 살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의 거룩한 산에 살 사람이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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