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특히 소녀는 홉스의 자연관과 인간관에 대해서는 일부는 이해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소녀는 소라섬에 있을 때에 생각들,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었다.
홉스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려면 자연에 대해 관찰할 필요가 있듯이,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인간에 대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소녀는 이해를 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유일하게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인간들은 외부환경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인식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에서 인간의 적극적인 활동을 본 홉스는 이러한 인간들이 외부적 인식을 가지려는 적극적인 원동력은 인간의 욕망과 공포에 있다고 홉스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고 소녀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여기서 홉스는 인간에 대한 사회철학으로 인간사회의 기계론적 인간관을 자연의 법칙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소녀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홉스의 기계론적 인간관에 대한 이해를 소녀는 공부하고 있는 물리학에서 많은 힘을 얻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소녀는 홉스의 자연관적 인간관을 인간의 인식구조가 자연의 법칙으로 해석한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칸트는 홉스의 자연관적 인간관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인간의 감성보다는 이성에 크게 비중을 두고 초자연적 인간관을 주장하고 있다고 소녀는 생각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즉 홉스의 생각은,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써 짐승과 마찬가지로 생물의 본능의 지배를 받고 충동적 행동을 하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이성을 지닌 존재로써 자연관적 존재인 짐승과는 구별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칸트는 인간은 이성을 타고 난 존재이므로 짐승과는 달리 욕망을 억제하려는 행동을 함으로써 인간은 도덕적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칸트는 도덕철학적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소녀는 칸트의 도덕철학적 인간관, 즉 이성론적인 인간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즉, 소녀는 칸트는 창조자를 인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지 칸트는 자연관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도 역시 자연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인간은 자연적으로 이성을 타고 난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인간의 이성론을 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소녀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짐승은 이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가 못되지만, 인간은 이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소녀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칸트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 즉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고 소녀는 생각을 할 때에 칸트의 인간관은 신이 부재한 자연론적인 인간관에서 벗어난 이론이 아니라고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녀는 칸트의 이성론적인 인간관과 자신이 믿어왔던 창조주의 창조론적인 인간관을 비교하기 시작을 하였었던 것이다. 즉 칸트는 창조자를 배제한 자연론적인 인간관에서 짐승과 인간을 구별함으로써 도덕철학적 인간관으로써 이성을 가진 인간과 이성을 가지지 못한 짐승의 구별을 주장하면서도, 사실 일부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수용하고 있다고 소녀는 정리하였다.
그리고 소녀는 창조론적인 인간관으로써 짐승과 인간은 모두 창조자에 의해 피조물로 존재하며,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써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 자유의지를 지닌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녀는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는 세상이란 창조주를 인정하는 피조세계를 말한다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관은 홉스가 말하는 기계론적인 인간관과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인 인간관으로 나누어진다고 소녀는 정리하게 되었다.』
<소라 섬 소녀 이야기 2편에서>
참으로 놀라운 소라인 것 같다. 비록 소설에 주인공이지만 말이다. 소녀는 어린 시절에는 외딴섬, 소라 섬에서 홀로 지내며, 아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자연세계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한편 할아버지로부터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 들으면서 자란 소녀의 세계는 창조적인 세계관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말 세상에 태어나는 수많은 아이들은 어떨까?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세계관을 가졌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의 순진함에서는 무엇을 보는가? 대부분의 어른들, 이미 인간관(人間觀)이 형성된 인간들은 그런 순진한 아이들을 보면 한결같이 감동, 감격을 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작동하는가? 그러면서 어린이들의 선한 마음을 가만두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도 소녀는 이러한 이중성을 육지에 사는 인간들에게서 보았던 것은 아닌지. 또는 거대한 미국이란 인간세계를 통해서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지..........
사실 그렇지 않겠는가? 흔히 인간들의 행동들을 바라보면, 이성보다는 본능을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겉으로는 신사(紳士)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잠시 어둠이 오고나 한적할 때에나 기회를 포착하고는 무슨 짓을 하려는지 예측할 수가 없는 본능적 행동이 발 빠르게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사회에는 항상 범죄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홉스의 논리가 타당하다고 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짐승은 자연적 본능대로 행동하지만, 인간은 자연적인 본능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을 기계론적 관찰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칸트도 자연적 존재론으로 이성을 관찰할 때에도 역시 기계론적 관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다시 정리하면, 인간의 세계관에는 크게 두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즉 진화(론)적 세계관과 창조적 세계관으로 말이다. 여기서 진화적 세계관이라고 하지 않고 진화론적 세계관이라 말하는 이유는 진화와 진화론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세계에는 유한적 진화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이란 유한적 진화가 아닌 무한 진화, 즉 절대적 진화로 이념화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론적 세계관이라 쓰지 않고 창조적 세계관이라고 쓰는 이유는 이념화된 것이 아니며 사실(fact)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두 세계관에 대해 소녀는 의문을 품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어떻게 인간세계가 두 가지로 가치관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혼란스러워하며, 갈등을 외면하지 못하며, 그래서 항상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녀는 어릴 적에는 몰랐던 인간세계를 성장해 가면서 거대한 인간세계를 만나면서 소녀도 갈등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렇다. 인간세계는 너무나 거대하여서 한 인간으로서 접하고, 적응하고, 이해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청년에 이르러서 찾아오는 사춘기(思春期)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청소년소녀들의 사춘기를 어른들은 우스개로 말하기를, 이성에 눈이 뜨기 시작하는 때라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성적현상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결국 청소년소녀들은 이런 어른들의 우스개 장난으로 중요한 시기인, 사춘기를 이성적(理性的)이 아니라 이성적(異性的) 관계로만 고정관이 형성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다시 정리하면, 이 세상의 세계관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이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세계는 이념전쟁이라고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