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해 줄지 생각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나는 적합한 선물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선물을 사던 때의 벅찬 감동을 기억한다.
또 포장지와 리본을 골라 점원에게 주고 내가 원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선물을 포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되돌아간다.
선물을 고르는 일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지금도 이렇게 되돌아보면, 나는 그 선물들이 개봉되는 순간을 보지는 못했다. 우편으로 보냈거나 아니면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놓아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개봉되는 순간이나 선물을 받고 감사해하는 말을 듣는 그런 순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축복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할아버지의 기도/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가장 외로운 것은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深考知思 다시 깊이 생각하고 깨달음을 생각하다]
레이첼 의 「할아버지의 기도」라는 책은 참 좋은 글들이 많다. 한 소녀를 위해 기도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는 모습에서도 참 좋아 보인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속도감에 쾌감을 얻을지라도 반드시 뒤따라오는 무언가의 고독감? 아님 허전함 등.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살지라도, 인간에게는 늘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문명의 흐름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지만, 반면에 불필요하듯 한 낭비성이 높은 또는 허황된, 표면적 쾌락에 대한 문명도 덩달아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매우 고고(高高)한 문화의식으로써, 도덕분자, 또는 동방의 예의지(禮意志)를 높이 삼는 것을 자부하였다는 어른들의 말말, 참 가관이었다. 그리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그 공간에 살짝 끼어 넣는 꼴을 많이도 봤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심하게 화제를 이끌어가곤 한다. 그러면서 조선의 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그 고고한 태도를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예의지를 내세우는 조선의 선비들, 양반들에게는 꼭 방문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많은 시조가 탄생하기도 했다. 그곳이 어디인 줄 아는가? 기생집인 곳이다. 아마도 드라마에서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왜? 그들, 선비나 양반, 특히 벼슬아치들, 그렇게 기생집을 들락거렸을까? 이것이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점잖게 보이고 속셈은 음흉해하는 것 말이다. 결코 인간은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로 의로울 수가 없으며, 전적으로 악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조선의 선비들, 양반들, 벼슬아치들은 겉으로 의로운 척, 예절 바른 척할지라도 속내에는 늘 외로운 것이지. 그러한 기생문화가 현대에 와서도 기생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입에 오르고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러하니 드라마에도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고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 않는가?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기생을 여전히 즐기면서 멸시하는 이중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한 남자로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노래도 상당히 많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 진정한 사랑을 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노래만 많은 게 아니라 사랑이란 용어 자체만도 상당히 많다. 이것도 사랑이야, 저것도 사랑이야~.........
사랑은 물건이 아니지 않은가? 사랑은 담아 놓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얼마나 웃기는가? 손으로 사랑의 하트를 만들어 주거나 받는 것처럼 행동을 보이는 데에, 늘 마음이 부끄러움을 느끼곤 하였었다. 그래도 유행이니깐, 마음의 표시이니깐, 참으로 편리한 세상인 것 같다.
물론, 상징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도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우스개로 하는 것이니깐.
참으로 신기하게도, 문명의 해택을 누리면 누릴수록 인간은 가식적인 생활을 많이 누리며, 대리만족을 찾는 모습들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여기에서 아담과 이브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첫 인류의 인간이니깐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에는, 말씀으로만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인간 이외에 피조물들은 모두 말씀으로 명령을 하니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하지 않았다. 손수 땅에서 흙을 취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땅에서 취하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도 손이 있으셨나? 어떻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 얼마나 멋진 곳일까? 그러니깐 두 연인이 살 거처를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두 연인, 아담과 이브는 정말 서로 사랑하였을까?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였을까?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은 후에, 그들은 어떠했을까? 서로에 대해 벌거벗은 모습에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 서로 알몸으로 지내지 않았나? 새삼스럽게 벗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니? 그리고 하나님이 찾으니 나무들 뒤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 웃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내가 먹지 말라고 네게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렇게 묻자, 아담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당신이 함께 하라고 주신 그 여자가 제게 주어서 먹었어요.”
여기서 아담은 그의 아내에 대해 호칭으로 ‘그 여자’라고 말했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이 준 여자’라니.......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준 것은 단순히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서 주신 것일까? 물론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심심풀이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8)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또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하니 아담도 이브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자주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계명으로 주심에서도, ‘서로 사랑하라!’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그럼, 사랑은 무엇인가? 아마도 논란이 많을 것이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랑은 에로스(육적인 사랑, 열정) 또는 필리아(우정), 그리고 아가페(무조건적인 사랑, 헌신)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랑에도 종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또는 사랑을 철학적으로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융합과 희생과 성장으로 이끌어주는 능동적인 의지와 연합의 기술이다.’ 이해가 되는가?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의 물질이나 기능적인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괴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곧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God is Love] 그러므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에도 그의 사랑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을 산을 오르내리면서 많이 깨닫게 되었다. 나무와 풀, 새, 벌레, 등등에서도 얼마나 오묘하게 창조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좀 더 사랑을 더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음의 말씀, ‘그분은 선하시고, 사랑이 영원하시다.’는 것에서 사랑이 무엇일까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자 하여 아담을 창조한 후에 여자를 창조하셨던 것에서도 놀라움을 깨닫게 된다. 특히 여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놓으셨으니, 여자에게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깊은 뜻은, 그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넣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천지를 창조하심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있으며, 여인이 아기를 낳는 것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브는 첫아들을 낳을 때에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즉 하나님과 함께 아들을 낳았노라고 말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아기를 낳게 됨에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일까?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가 여인에게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사랑, 즉 ‘어머니=사랑’[Mom is Love]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이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으로 형제간에, 친구 간에, 이웃 간에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나중에는 성인이 되어서 연인의 사랑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사랑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행복인 것이다. 인간의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다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아닌 동물(개, 고양이, 새 등)을 사랑하며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사랑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랑은 반드시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뤄져야 만이 참 사랑을 하게 되고, 하나님과도 사랑이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데에서 행복이, 기쁨이, 축복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고 여러 번이나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아담(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자연을 사랑하기보다는 소유하고 욕망대로 파괴하고 그러하지 않은가? 그 결과로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사랑의 능력 안에서 존재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면서 감사와 기쁨이 솟고, 행복을 얻는 것이다.
끝으로 시편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시다.」(시편 1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