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의 단편집]
원스 글
1999.9.26
제 1 편
굵은 빗줄기를 피해 길 다방에 들어선 나는 한적한 다방 분위기를 의식하며 창가에 자리하고 앉았다. 여전히 창밖은 비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비에 젖은 군모를 벗어 탁자 위에 놓고 의자에 기댄 채 다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그림들이 멋없이 이리저리 걸려 있다. 내가 들어온 출입문 쪽에 커다란 어항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계산대에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자가 손톱을 깎고 있었다. 단정한 모습의 정양은 내게 다가와 탁자에 잔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무슨 차를 드릴까요?”
“커피!”
나는 투명하게 대답을 했다. 그녀는 돌아가 잠시 후에 커피를 한 잔 가져와 탁자에 살며시 놓고 갔다. 나는 물끄러미 커피를 내려다보다가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빗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자유로움을 훔쳐보고 있었다. 선임병에게 시달리고 하사관들에게도 시달렸던 나는 어느새 능숙한 선임병이 되었다. 주말이면 외출증을 만들어 자유자재로 외출을 할 수 있었고 부대에서는 졸병들이 선임병 대우를 해 주어서 편했다. 그리고 따스한 남쪽에 있는 부대로 명을 받아 전방에서 고생하는 병사들보다는 한결 편했다. 그렇지만 육신이 편한 만큼 정신적 고통은 매우 컸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편하게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수시로 비상소집을 내렸다. 그리고는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기압을 주곤 했다. 그러므로 군대생활은 잠시 자유를 잃은 생활이라 생각이 든다. 그런 나는 지금 부대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쏘다닌 후에 다방에 앉아 있다. 그런 나는 잠시 자유인으로써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잠시라도 자유를 누리려고 주말마다 외출을 했다. 부대로 귀가하기 전에 나는 길 다방에 들러 커피를 마시곤 하였다. 오늘은 쏟아지는 비를 피해 일찍 길 다방에 들린 것이다. 정양은 나에게 다가와 마주 앉으며 말을 걸었다.
“혼잔가 봐요?”
“예, 혼잡니다.”
나는 정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잔잔한 미소는 메마른 내 마음에 단비로 내려앉는다. 나는 그녀에게 커피를 권했다.
“한 잔 하시죠?”
“예, 고맙습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가져와 자리에 앉는다.
“아저씬 술을 안 하나 봐요?”
“예, 전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술을 안 해요”
나도 모르게 내 신분을 말해 버렸다.
“교회에 나가시나 봐요. 저도 전에 교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교회에 간 적이 있다는 말에 왠지 친근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고 평소에 느껴왔기 때문에 빙긋이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비가 멈춘 것 같다. 나는 커피 값을 계산하고 그녀를 바라보고는 다방을 나왔다. 부대에 들어갈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외출을 즐겁지만 다시 부대로 들어가는 심정은 도살장에 들어가는 돼지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잠시 쉬고 있을 때에 한 장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사병은 돼지와 같다. 돼지는 한번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것처럼 사병은 전쟁에 한번 써먹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말이면 나는 외출을 했다. 영화를 한 편 보고 버스를 타고 목적 없이 가다가 종점에 이르러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간다. 저녁식사는 싼 라면으로 때우고 부대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반듯이 부대로 들어가기 전에 부대 근처에 있는 길 다방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시며 마지막 자유를 음미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길 다방에서 정양과 함께 커피를 마실 기회가 많았다. 그녀는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항상 내 자리에 와 앉는다. 나는 점점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런 다방에까지 왔는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를 꺼려했으나 나에게는 말해주었다. 그녀는 시골에 살았으며 고교시절에 한 남학생에게 강간을 당해 도저히 학교를 다닐 용기가 없어서 가출하여 서울에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식당에서 일했으나 생활하기가 힘들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술집을 전전하며 생활하다 보니 다방에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전혀 술집을 돌아다니며 놀아난 여자 같지는 않았다. 매우 깔끔하고 옷차림도 세련되어 교양 있는 집안에서 자란 여자 같았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그녀는 잘 받아주고 비판을 늘어놓으면 매우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주기도 한다. 그녀와 대화를 하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언제나 짧게 느껴질 정도이었다. 주말이면 나는 외출하는 이유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점차 그녀를 만나기 위해 외출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일찍 외출하여 길 다방에 갔다. 이른 아침이라 정양은 다방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방금 일어난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도 화장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얼른 얼굴을 돌리고 청소에 열중했다. 난 아무 말 없이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아 청소하는 그녀의 모습을 흩어보고 있었다. 그녀가 쓸고 간 자리마다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수북이 쌓인다. 그녀는 서둘러 청소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방 안에 홀로 된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일찍 온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간이 좀 지났을까? 잠시 후에 그녀는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나타났다.
“바쁜 아침시간에 웬일이세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물 잔을 내왔다.
“보고 싶었어.”
나는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는 그녀가 커튼을 걷어내는 모습을 주시했다. 햇빛이 가득히 실내를 채워주었다. 어둠 속에 살짝 비친 그녀의 모습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밝은 실내에서 본 그녀는 역시 다방 레지였다. 허지만 다방에서 커피나 날라주며 객들의 희로애락에 장단을 맞추며 미소를 파는 여인 하고는 좀 달랐다. 손님을 대하는 그녀에 모습은 언제나 진실했다. 그녀는 농담도 받아넘길 줄 알고, 짓궂은 손님에겐 매섭게 잘라내 손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롭게 보이는 손님에겐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행실을 보고 손님들은 그녀를 매우 좋아한다. 나도 그런 손님 중에 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을 택하여 그녀와 함께 있고자 나는 아침 일찍이 길 다방을 찾았다.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단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한 나의 심정을 정양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탁자를 닦고 재떨이와 설탕 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물 잔을 조금 마시고는 다시 눈길을 일하는 그녀의 모습에 두었다. 부지런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이 새삼 달리 보였다. 대체로 술집 여자나 다방 아가씨들은 게으르고 지저분한 여자로만 보아왔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지도 않았고 옷도 천박하게 입지 않았다. 그녀는 다방 레지로 온 지 얼마 안 된 아가씨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 그녀가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을 뿐 아니라 주인 마담도 칭찬이 자자했다.
“정양이 아니면 우리 길 다방은 문 닫아야 해요.”
전화로 주문이 오면 대체로 정양이 다녀왔다. 다른 아가씨가 가면 손님들이 싫어한다고 한다. 길 다방은 정양 말고도 아가씨가 셋 있다. 키 작은 김 양과 네 살 적은 조 양 그리고 나이가 많은 박 양이 있었다. 네 살 적은 조양은 쾌활하면서도 천방지축이었다. 어젯밤에도 어떤 군인과 외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늦는다고 나중에 정양이 얘기해주었다. 후에 조양은 자신이 임질에 걸린 것을 내게 살짝 말해주어 의무병인 나는 그녀에게 약을 구해 주고 주사도 놔주었다. 조양은 정양을 언니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고 있는 사이었다. 그래서 정양이 없는 날은 조양이 대신 말벗이 되어줬다. 그녀는 나에게 곱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역시 그녀의 지금의 모습이 좋았다. 늘 저녁에만 보던 그녀가 아침에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커피를 한 잔 가지고 내 자리로 왔다. 나는 마음이 들떠서 그녀를 가까이 보고 싶었다.
“지루하셨죠. 커피를 드셔요.”
“응, 정양의 부지런한 모습이 맘에 들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안해하는 정양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갖다 준 커피를 마셨다.
“이리 와 앉아요.”
나는 정양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양은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로 와 앉았다. 그녀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오직 그녀의 숨소리만 드리는 것 같았다. 숨소리가 조금 가쁜 듯했다. 그녀도 사랑의 요동이 이는가 보다. 나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끌어당겼다. 그녀도 바짝 안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다방 문이 열리자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물 잔을 들고 갔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손님을 반기자 한 중년 신사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는 커피 잔을 들여다보며 짙은 커피 빛깔 위에 정양의 가슴을 새겨보았다. 오늘 아침은 정양 혼자서 손님을 맞는가 보다 물 잔을 손님에게 가져가니 손님은 정양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정양, 오늘은 참 예쁘군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예, 좋은 일이 있어요.”
정양은 간단하게 대답을 한다.
“허, 허, 정양의 그 좋은 일의 반만 날 주면 안 될까? 오늘 나도 좋은 일 좀 생기게…….” “아저씨는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사모님께 쫓겨났어요?”
“일찍이 만날 사람이 있어서……. 모닝커피 한 잔 줘.”
그녀는 잠시 후 반숙 계란의 노른자가 든 모닝커피를 가져와 중년 신사가 앉아있는 자리의 탁자 위에 살며시 놓고는 다시 내게로 와 앉는다. 난 손님에게 미안한 감이 들었다.
“손님을 홀로 두면 어떻게 해.”
“괜찮아요, 매일 오시는데 뭐.”
“오늘은 내가 일찍 와서 아침부터 바쁘게 한 셈이죠.”
“실은 그래요. 정신이 없었다니까요? 이젠 괜찮아요.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많을 것을 배우게 되니 옛날 여고시절이 생각이 나요.”
“내게 배울게 뭐 있나. 괜히 하는 소리겠지.”
“정말이에요. 다른 군인과 달라요. 아저씨랑 마주하고 있으면 내가 손님으로 착각할 때가 가끔 있어요. 마음이 참 편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정양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 보면 내가 군인이라는 것을 잊을 때가 많아 정양을 통해서 얼었던 내 심정이 녹는 느낌이야. 참, 정양도 커피 한 잔 해요. 나 혼자 커피를 마신 셈이군.”
“괜찮아요, 아침을 안 먹었거든요. 어제 밤늦도록 술을 마셔서 그런지 속이 거북스러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중년 신사는 연신 시계를 바라보고는 다시 커피를 마신다. 올 사람이 아직 안 온 모양이다. 다방 문이 열리며 조양이 들어왔다.
“언니, 나 왔어. 별일 없지?”
“그래 재미있었니? 아침은 먹고 오는 거야?”
“응, 대충 먹었어. 언니는?”
“속이 거북해서…….”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아저씨.”
조양은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마담이 들어왔다.
“얘들아, 별일 없니? 군인 아저씬 아침부터 웬일이신가.”
정양은 별일 없었다고 하면서 계산대를 정리하고 있다.
“예, 아침 일찍 나왔는데 갈 데도 없고 해서 차나 한 잔 할까 하고 왔습니다.”
사실은 정양과 함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적당히 이유를 붙였다.
“정양을 만나러 왔군. 오늘은 정양과 함께 시간을 갖고 싶은 게지. 말 안 해도 잘 알아요. 아침부터 수고가 많았는데 조금 있다가 박 양이 오면 외출시간을 줄 테니 정양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 봐요. 군인 양반!”
정양의 얼굴이 밝아오는 것을 난 보았다. 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날아갈 듯 기뻤다. 중년 신사는 마담이 한 말을 듣고 있다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 허, 정양이 오늘 좋이 일이 있다고 한 것이 군인 양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군. 부럽군! 부러워…….”
정양은 잠시 후 내 자리에 와 앉았다. 나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정양도 말이 없었다. 우리에겐 말이 필요치 않았다. 곧 우린 둘만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뜻밖에 얻은 정양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박 양은 왜 늦는 걸까? 나는 시간이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박 양은 어린 계집아이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출퇴근을 한다. 아마 이웃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오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언제나 박 양은 맨 나중에 길 다방에 나오는 편이다. 그래서 박 양이 오면 함께 외출하라고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정양과 함께 있을 시간을 얻은 셈이다. 열 시가 다 돼서야 박 양이 나타났다. 매우 피곤해 보였다.
“언니,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좀 피곤해, 어제 밤새도록 우리 딸년이 기침해서 그래. 약국이 일찍 문을 열지 않아서 어찌할 수가 없었어. 아침에는 딸년이 다시 열이 나고 하니 어떻거니 약을 먹이고 오느라 늦었어.”
“참 걱정이다. 속히 낳아야 하는데……. 언니, 나 오늘 외출 좀 할게. 허락받았어.”
정양은 나를 끌고 길 다방을 나왔다. 오늘따라 날씨는 쾌청하다. 우리는 일단 걸었다. 그녀는 내 팔을 끌어안았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서 우리는 에덴 행 버스를 탔다. 차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맨 뒷자리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뒤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건물들 새로 햇살에 비친 짙은 명암을 음미하고 있었다. 삶이란 저 짙은 명암처럼 깊고 무거운 것들로 엮어가야 아름다운 선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긴다는 듯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쩜 자신의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이랄까 그런 기분에 젖어든 여인 같았다. 손님들을 대하느라고 뒤치다꺼리하느라 한 치의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이제 자신에게로 돌아온 그녀를 내가 또 빼앗아 가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나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갖게 된 기쁨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골몰하게 되었다. 40여분이 지나자 버스는 종점인 에덴 공원에 도착하였다. 피곤했던지 그녀는 깊이 잠들어있었다. 나는 그녀를 깨울 수 없어서 텅 빈 차 안에 그대로 있었다. 살며시 눈을 뜬 그녀는 몸을 바로 고치며 말했다.
“다 왔어?”
“아까 도착했는데 정양을 깨울 수가 없었어.”
“미안해, 지난밤에 피곤했나 봐 자기 어깨가 참 편하다”
난 그녀가 자기라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우린 자기 사이가 된 셈이다.
“정양, 내가 가자면 어디든 가겠어?”
“응”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자기라 부르더니 이젠 말을 놓는다. 그러나 난 싫지가 않았다. 더욱 그녀가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함께 걸었다. 도시에서 좀 떨어진 변두리라 한적했다. 교회 종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지고는 교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도가 백여 명쯤 있는 자그만 교회였다. 우린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라는 제목으로 목사가 설교를 했다. 성경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수가 이른 아침에 산에서 내려와 성전 가에 앉았을 때에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질질 끌고 와서 예수 앞에 던지고는 소리쳐 물었다.
“간음한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모세는 돌로 치라했다.”
예수는 묵묵히 땅 위에 글을 쓰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쳐라”
무리들은 하나씩 빠져갔다는 내용이었다. 교회를 살며시 빠져나온 우리는 침묵으로 얼마를 걸어가다가 중국집을 찾았다. 속이 안 좋다고 한 그녀는 가락국수를 시켰고 나는 자장면을 시켰다. 아침을 커피 한 잔으로 때운 나는 정신없이 먹었다. 그녀는 평소같이 않게 얌전히 먹고 있었다.
“정양, 먹는 모습이 아름다워.”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우린 배를 채운 후에야 입을 열었다.
“마침 오늘이 주일이라서 자기랑 교회에 가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나도 옛 생각을 했어요. 어릴 적엔 교회도 열심히 다녔었는데 지금은 별 생각이 없어요. 오히려 마음만 아파요.”
“난 별 뜻 없이 자기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야.”
나도 모르게 그녀를 자기라고 불렀다.
“우리 자리를 옮겨요. 분위기 있는 데로요. 오늘은 내가 살게.”
정양은 내가 군인이라서 인지 모든 걸 자기가 내겠다는 것이다.
“괜찮아, 나도 돈이 많아∼ 자기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귀한 시간을 투자 없이 되겠어?”
나는 그녀에게 농담을 했다.
“졸병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
그녀는 맞장구를 쳤다. 그녀와 나는 중국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에덴 힐로 갔다. 에덴 힐은 술과 커피를 파는 레스토랑이었다. 전경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그녀와 나는 바다가 잘 보이는 탁 트인 자리에 앉았다. 바닷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많았다. 멀리 수평선에는 배가 보이고 작은 섬이 한 둘씩 있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은 그녀를 더욱 고상한 여인으로 여기게 해 주웠다. 아침에 길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기에 나는 체리 주스를 주문했고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주스 잔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비춰본 나는 ‘핑크 빛 속에 여인’ 속으로 되새겨보며 주스를 조금 마셨다.
“자기, 평소에도 그렇게 말이 없어요? 늘 귀가 시간 때에 다방에 와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별로 말이 없어서 많이 궁금했었는데 오늘 보니 정말 말이 없네요.”
나는 당황했다. 재미없는 사람이란 소리인가 하고 말이다.
“글쎄.”
“그래도 뭔가 할 말이 많을 것 같아 보였는데.”
“할 말이 많다…….”
“아까 교회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설교를 듣고 그 여인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요. 저도 오래전에 집을 떠날 때에는 그런 눈총이 무서웠거든요.”
“그래, 누가 누굴 죄인 취급할 수 있겠어. 전에 읽은 「주홍글씨」란 책에서 간음한 여인의 가슴에 주홍글씨로 영어 에이(A)라고 쓴 천을 달고 다니게 했지 그리고는 사람들은 그녀를 볼 때마다 돌을 던졌어. 나는 왜 사람들이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거든.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위선적 태도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걸 말이야. 사람들은 한 사람을 정죄하므로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남을 정죄할 수 없는 거야. 이 사실을 예수는 지적한 셈이지. 사람들은 남을 지배하므로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고 하고, 남을 정죄하므로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하지. 이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말해.”
“무엇이 위선인지는 몰라도 간음한 여인을 쳐다보는 그런 사람들을 우린 저주해요. 뭐, 너희들은 얼마나 깨끗해하면서 말이에요.”
“사실 누가 사람을 심판할 수 있을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에 좌우편에 죄인이 둘이 있었는데 한 죄인은 예수를 비난했고 다른 죄인은 예수를 이해했지. 죄인이 아닌 그분이 자기들과 함께 형벌을 받는 모습에서 예수의 희생을 이해한 거야.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지.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을 알게 돼. 자신을 알 때에 참 인생을 알게 되는 거야.” “맞아요.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만이 깨끗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가끔 대화를 해보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을 해요. 자기들이 재판관이나 되는지, 참”
그녀가 하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정말 누굴 정죄할 수 있는가? 오늘에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을 쉽게 정죄한다고들 말한다. 난 주스를 마시면서 그녀의 말에 끄덕였다. 그녀는 내 곁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멀리 수평선으로 미끄러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잠시 말없이 함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온기가 내 몸에 스며들어 딱딱한 마음을 녹여 자유의 환희를 맛보게 했다. 어느새 햇살이 바다로 수북이 내려앉아 물결 따라 실루엣을 이루는 광경을 보며 그녀의 숨결과 함께 나는 유희하고 있었다. 힐 안에는 두세 사람이 있을 뿐이다. 가끔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 외에는 흘러오는 음악 소리에 우린 정체되어버린 듯이 오랫동안 에덴 힐에 있었다. 힐 안에는 잔잔히 음악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Stay with me」라는 노래였다.
「나의 두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 눈동자
자꾸 가슴이 시려서 잊혀지길 바랬어
꿈이라면 이제 깨어났으면 제발
정말 네가 나의 운명인 걸까
넌 Falling You
..........................................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네가 사는지
(Stay with me)
내 안에 숨겨왔던 진실
.........................................」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은 심정에 과거도 미래도 바로 이 시점에서 잊혀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시간은 영원하리라. 영원하리라. 아마 그녀와 나는 그렇게 소리쳤을지 모른다. 해변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져 갈 때까지 눈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바다 풍경 속에 우리는 깊이 잠들었었나 보다 떠들썩하는 소리에 문 쪽을 바라보니 많은 무리의 남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고는 지금 몇 시냐고 물었다. 나는 군대생활을 잘하라고 어머님이 사 주신 시계를 보았다. 벌써 다섯 시가 넘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면서 내게 말했다.
“우리 해변을 걸어요.”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따라 일어나 에덴 힐을 나와 그녀와 함께 해변을 걸었다. 해변은 유달리 짙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보였다. 우린 사람들이 별로 없는 해변으로 걸었다. 나는 모래를 한 줌 집어 바다로 던졌다. 모래는 넓게 흩어져버렸다. 다시 모래를 한 줌 집어던졌다. 그녀는 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모래를 차면서 이리저리 걸었다. 갈매기가 가까이 다가오는가 하면 멀리 날아가고 밀려오는 파도는 다시 되돌아간다. 언젠가 우리도 갈매기와 파도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일까? 파도에 하나씩 허물어져 가는 모래같이 사람들의 인생도 그러할까? 정양과 보내는 이 시간도 그렇겠지. 처음 길 다방에서 나올 때 부푼 기대가 시간이 흐를수록 모래처럼 허물어져 가는구나. 출렁이는 파도에 발을 맡기며 우린 서로 껴안은 체 말없이 기우는 해를 바라보았다.
“자기 배 안 고파? 난 고픈데…….”
그녀는 이 아름다운 석양을 잃고 싶지 않은 듯 자리를 떠나자고 했다.
“그래,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갈까?”
“아니, 시끄럽고 화려한 곳으로 가요?”
우리는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신을 신었다. 그녀의 다리는 희고 아름다웠다. 곧 택시를 타고 화려한 거리로 갔다. K 대학과 B 여자대학이 가까이 있어서인지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아직 이른 저녁인지라 거리에는 옅은 네온사인이 노을에 어울려져 환상적인 거리 같았다. 우린 고급스러운 베르토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조명이 호화찬란했다. 강렬한 음악 소리를 몸에 담으면서 창가로 가서 앉았다. 그녀와 나는 오가는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건물들은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 가며 네온사인과 실내 불빛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젊은 남녀들의 이야기도 거리로 퍼져가듯이 불빛에 어울려 거리를 메웠다. 레스토랑의 보이가 자리에 온 것도 모른 체 그녀와 나는 밤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시 역겨운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 때문일까? 그녀는 말이 없이 조용했다. 그녀의 입장과 나의 입장은 비슷한 것 같았다. 나도 그녀처럼 지겨운 부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찹찹한 심정에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드실까요?”
보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글쎄, 정양은 뭐 들래?”
“전, 돈가스로 하겠어요. 자기는?”
“나도 돈가스로 하지 뭐. 돈가스 둘 줘요?”
“예, 알겠습니다.”
보이가 자리를 떠나자 나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실내조명에 비추인 그녀의 모습은 천사같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자기, 돈가스 좋아해요?”
“응, 어릴 적에 숙부와 자주 돈가스 먹으러 양식집에 갔었어. 그땐 코르덴 재킷에 머리는 가르마 탔었지.”
“꼬마 신사였군요. 전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랑 용돈 모아서 비싼 양식집에 가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양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쩔쩔맸던 것이 기억나요. 맛은 잘 몰랐어요. 지금도 가끔 저 혼자서 양식집에 와서 먹곤 하지요. 그러면 옛 친구랑 함께 재잘대며 지냈던 일이 생각나요.”
“옛날이 그리운가 봐요?”
“아뇨, 옛날을 회상하면 현실이 슬퍼지기도 하지만 새 힘이 나거든요. 나에게도 철없던 낭만들이 있었구나 하면서 말이에요.”
“과거가 없다면 인간들은 비참할 겁니다. 비록 불행한 과거라 할지라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지요.”
“네, 그래요. 그런 면에서 먹으러 오는가 봐요. 자기도 불행한 날이 있었어요?”
“물론이지, 열 살이었나? 그땐 아버지를 잃고 너무 슬펐었지. 사춘기가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게 생각되었어.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이 왠지 슬퍼 보였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미워지더군. 여섯 살 난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아빠 같은 존재였고 집안에는 가장의 역할을 맡은 셈이지. 하지만 집안 살림은 넉넉했어. 숙부가 자주 찾아오셔서 도와주시곤 하셨지. 사춘기 때에 방황을 많이 했지. 그때 어머니는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야. 하지만 그때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어. 어머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후에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이 안정되었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
“저도 어릴 적에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는 교회에서 선물을 주니깐 간 셈이죠. 그러나 교회에 있을 때는 마음이 즐거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중등부라고 하나요? 중학교 때에 교회에서 늦게까지 남아서 성탄절 준비하던 생각이 나요. 부활절에 계란 삶느라고 늦도록 일하던 것도 생각나요. 지금은 교회 하곤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지요. 가끔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공연히 쓸쓸해져요.”
“지금이라도 교횔 다녀보지. 시간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끔이라도 말이야.”
“글쎄요. 우리 같은 처지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교회를 다녀요. 눈총이 따갑지.”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것뿐이야. 누가 뭐라 해도 내 믿음대로 지켜나가는 거야. 물론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다른 얘기나 해요.”
그녀는 보이가 가져온 돈가스를 칼질하면서 화제를 바꾸려 한다. 나 역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우린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식사가 끝날 때에 그녀는 립스틱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내게 말했다.
“응, 벌써 돌아가야 할 것 같지요. 너무 늦으면 마담 언니도 싫어할 거고……. 지금쯤이면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겠는데요. 자기도 부대에 들어갈 시간이 넘었지요?”
“응, 지금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자유시간일 거야. 나야 정문 위병과 잘 아는 사이고 하니 별 문제 될 것은 없어. 하나 정양과 헤어져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군. 언제 이런 시간을 또 갖게 될지…….”
“저도 권 병장과 이렇게 시간을 보내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하지만 저흰 손님을 맞이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러니 내 시간만 찾으면 장사가 되겠어요? 그래도 권 병장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볼게요. 오늘은 제가 산다고 했지요? 다음에는 권 병장이 꼭 사줘야 해요?”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다음이야 당연 내가 사야지…….”
우리는 베르토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길 다방으로 향했다. 길 다방은 내가 있는 부대 바로 옆이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가는 셈이다. 차 안에서 그녀는 내게 머리는 기대고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 말이다. 나도 그녀를 가슴으로 꼭 껴안아주었다.
“내가 제대를 하면 우리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까?”
“글쎄요? 군인들은 떠나가는 사람들이잖아요? 무슨 약속을 해요. 미련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부대 옆 다방 아가씨들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난 그렇지 않아. 자기를 진정 사랑하게 될지 모르니깐.”
나는 슬쩍 내 마음을 비춰주고 싶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 믿었고 우리 사이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택시는 길 다방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택시 값까지 내주었다.
“정양, 오늘은 너무 좋았어. 그리고 신세도 많이 지고, 곧 내게도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지?”
“그럼요, 꼭 갚으세요! 전 빨리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급히 다방으로 뛰다시피 들어갔다. 나는 차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가세요라고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군기가 빠졌어도 귀가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이렇게 태연해 할 수는 없었다. 부대는 길 다방에서 걸어서 5분밖에 안 된다. 정양과 함께 있는 동안은 나는 행복한 자유를 누린 셈이다. 정문에는 위병이 둘이 서 있었다. 나는 경례를 하며 주변을 살폈다.
“별일 있어?”
혹시 당직 하사관이나 장교의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경계태세였다.
“권 병장! 오늘 끝내주게 좋았나 봐. 이렇게 늦은 적이 없는 자네가 웬일이야?”
그리고는 큰소리 내어 ‘받들어 총!’ 하면서 ‘이상 근무 끝!’ 하며 보초병은 씩 웃었다. 나는 찔끔했다.
“쉬!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지금 몇 시야?”
“9시야, 방금 점호 끝나고 취침에 들어갔어.”
“수고해!”
나는 조용히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김 일병이 내무반 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나는 외출복을 벗고 속옷 바람으로 동료가 마련해 놓은 담요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팔베개하고는 정양과 함께 보낸 하루를 회상하고 있는데 옆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박 병장이 말을 걸었다.
“뭘 하느라 이제 오냐? 저녁식사는 했냐? 계집질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럼 네가 이렇게 늦도록 뭘 했다는 거야?”
“사실, 요 앞에 길 다방에 정양 말이야. 함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거든,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침 커피 한 잔 할까 하고 갔는데 뜻밖에 마담이 시간을 허락해 줬어. 그래서 정양과 하루를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여, 자네 오늘 운수대통했네, 옛말이 틀림없어 얌전한 것이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라. 자네가 바로 그걸세.”
“웬 말씀…….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마. 단지 식사나 하며 대화를 했을 뿐이니깐. 그런데 정양이 어딘가 모르게 나를 좋아하는 것 같고 나도 정양이 좋아지는데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되지. 남녀의 관계는 두 가지로 해석하지. 일시적으로 즐기기만 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사랑하느냐 하는 거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는 거야. 여자도 마찬가지야. 즐기기만을 원하는 여자도 많아. 우리 군인이야. 뭐 한 때 즐기는 거지. 군인에게 미래가 있냐?”
“글쎄, 모르겠어!”
“야, 야, 그만 자! 복잡할 땐 자고 나서 생각하는 게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