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낭만적 사랑은 아무 의미도 없고 차가운 세상에 의미를 준다. 사랑은 자율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외로운 군중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타인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타인과의 분리를 극복하고, 끝없이 선택해야 하는 삶에서 휴식을 얻는다. 또한 최소한 짧게나마 모든 의심과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거나 갖고 싶다는 욕망은 재산을 소유하고 축적하고 싶다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현대 소비사회는 물건을 팔기 위해 일부러 낭만적 사랑을 이용하기도 한다. 사랑을 이용한 판매 전략은 낭만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을 문화의 최고점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앨런 맥팔레인 지음>
낭만적인 사랑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인기를 끌었다. 영화나 소설, 팝송 등에서 활발했다. 사랑은 낭만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각인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매우 흥분되게 하는 용어인 셈이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의 불씨는 자본주의 문화의 산물인 셈이다. 특히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판매 전략으로 이용하고 있는 매체로 낭만적 사랑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미련한 곰이 꿀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위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런 달콤한 사랑이 바로 낭만적 사랑인 것이다.
애인에게 장미 백만 송이를 주는 것이나 소박하게 사탕 한 봉지를 주는 사랑의 표현들을 아름답게 구사하는 것을 낭만적 사랑으로 묘사되어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한편 나의 사촌 여동생은 초등 6년 때부터 연예 소설을 만화방에서 빌려와 즐겨 읽었다. 그때에 난 그녀에게 너무 열열이 보면 결혼을 실패하게 되기 쉽다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나이 많은 노신사와 결혼을 했으나 아들 하나를 낳고 헤어졌다.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연애소설에 빠져서 살고 있다. 누구나 낭만적 사랑을 꿈꿀 수는 있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마는 아닌 것이다. 참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달콤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