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사랑의 그림자

[책 속에 생각을 담다]

by trustwons

118. 사랑의 그림자



“……. 다시 말하면, 참된 연애란, 어떤 한 여성이 어떤 한 남성을, 또는 어떤 한 남성이 어떤 한 여성을 이 온ㅍ 세상, 온 우주 간의 다만 오직 하나의 이상으로 믿어, 외로운 인생행로의 가장 아름다운 · 진실된 · 참된 반려자(伴侶者)라고 믿어, 그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나 아깝지 않고, 그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나 주고 싶은 바치고 싶은 나의 반신(半身)이라고 믿어, 이 두 사람 · 두 남녀 · 두 반신 · 두 반려자 · 두 이상이 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보다 더 큰 인격, 보다 더 큰 이상적인 생활을 이루는 데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혈관 속에 거룩한 사랑의 본능을 넣어주신 것은 사실이다. 「바이불」이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바이불」은 말하기를 이 거룩한 본능을 남용할 때는, 너희의 벌거벗은 수치를 들어내며 너희 앞에 저주를 두겠다고 하셨다.”

“물론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가령 한 여자가 사랑해서는 안 될 어떤 남자에게 가슴이 저리도록 사랑을 느낀다든가 또는 그와 반대든가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일은 곤란하기도 하다. 그런 못 이를 사랑이라면 애당초 안 생기면 좋지만, 그러나 생기면, 불행히도 생기면, 의지적인 힘으로 그것을 억제해야 하지. 즉 사랑의 정화(淨化)가 필요하지. 우리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이성의 노를 저으며 감정의 돛을 달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차에게는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가는 힘과 멎는 힘이다. 가는 힘이 없다면 물론 차는 아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멎는 힘이다. 가기만 하고 멎을 줄을 모르는 차를 한 번 생각해 보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를. 가는 힘은 감정이요, 멎는 힘은 의지요, 이성이다. 즉 다시 말하면 어디까지나 그 사랑이 허용되는 한계까지만 사랑하여야 한다. 하기 힘들다고 안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God forbids.」하나님이 금하시니까. 하기 힘든 것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간생활의 전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만일 이런 경우에 의지를 발동시키지 않고 감정이 달리는 대로 내맡긴다면 하나님의 질서는 깨지고 말아.

「브라우닝」(Browning)은 「Pippa Passes.」란 시에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무사태평>이라고 했지만, 일단 무질서한 사랑이 오락가락 하게 되면 이 무사 태평한 신의 「오-더」는 깨지고 만다. 「브라우닝」의 시 기억하고 있나? 언젠가 책에 나왔던 거 말이야.


The year's at the spring 해는 봄

And the day's at the morn; 날은 아침

Morning's at seven; 아침은 일곱 시

The hillside's dew­pearled; 언덕 기슭에는 이슬방울이

반짝이고

The lark's on the wing; 종달새는 하늘에 날고

The snail's on the thorn; 가시나무 위에는 달팽이

God's in his heaven ---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All's right with the world. 세상은 무사태평이로다.


나는 「브라우닝」의 이 시가 아무리 외워 봐도 싫지가 않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이 시의 참 맛을 그대로 맛보기 위해 그야말로 일찍 일어나, 이슬방울 반짝이는 언덕길을 걸어가면서 달팽이를 찾으면서, 그러다가는 고개를 들고 아침 푸른 하늘 위에 높이 높이 떠서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를 들으면서 미친 듯이「브라우닝」의 이 시를 외우군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감격이 이제는 벌써 차츰 둔하여지고 쇠하여지는 것만 같아 슬프다.”

<젊은 날의 노오트/ 정무심의 글에서>



그래서 나도 임석영 선생님의 말대로, 브라우닝의 이 시를 외우려고 흉내를 내면서 이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직 중학생인 나로서는 그렇게 감동이 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산을 걸으며 자연을 좀 더 가까이할 수가 있었다. 이제야 늙은 나이에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의 깊은 뜻을 조금은 깨달아진 듯하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무사태평하구나.’의 글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았다. 참 사랑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지배하고 군림하고 억압하고 복종하고 소유하려는 욕망 속에서 인간들은 사랑이라는 카드를 내밀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본능, 보고 싶고, 주고 싶고, 바치고 싶은 애절함에 심장이 뛰고 가슴이 뛰고 마음이 요동침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잘 교육된 인식의 틀에서 사랑의 반응과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 이성적 사랑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본능적으로 애정을 표현할 때에는 더욱 순수하고, 진실이라 여기게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 미디어 매체들, TV의 프로들, 그러면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중가요처럼 감정을 쏟아내고, 공감하며 희로애락의 인생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참 사랑은 아기에게 젖을 주는 여인의 모습에서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인의 사랑, 친구의 사랑, 형제의 사랑, 이웃의 사랑, 조국의 사랑, 인류의 사랑 등등은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온 그림자일 뿐이다. 그래서 타락한 첫 여자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표준 새번역)

여인이 고통 없이 해산을 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것이며, 그와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사랑은 참되며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어머님의 은혜』의 가사가 생각이 난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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