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이어지는 감성.
얼마 전 천변 위로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다가 오리를 보았다.
바위 위에 올라앉아 고개를 폭 묻은 채 햇살 아래 졸고 있는 오리가 너무 귀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집에 데려가 누군가에게 꼭 보여주고만 싶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는 달팽이였다.
비가 온 뒤 날이 개면, 가끔 달팽이를 볼 수 있었다. 빗물이 채 마르지 않아 촉촉한 달팽이를 만나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막 불렀다.
보통은 같이 하교하던 친구나 동생.
어쨌든 아는 사람이면 무조건 불러댔다.
그게 불가능한 날엔 너무 아쉬웠다.
내가 본 것을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그 감명이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누군가와 생생하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
나는 그것을 이른바 '보여주고 싶어' 병이라고 명칭 했다.
그것은 친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집의 특별한 감성에서 비롯되었다.
아빠의 고향은 경상도에 위치한 어느 시골마을이었다고 했다.
소 풀 먹이러 산을 타고, 친구들과 논밭을 누비며 자란 산골 소년이 커서 우리 아빠가 되었다.
아빠가 아주 어린 시절, 얼큰하게 취한 할아버지가 늦게 귀가를 하신 날이 있었다고 한다.
"나 왔다."
방으로 들어선 할아버지 손에 이상한 게 들려있었다.
푸드덕, 푸드덕.
그것이 날갯짓을 하더란다.
아빠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보니,
그것은 부엉이였다.
할아버지가 부엉이의 양다리를 움켜잡은 채 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부엉이 눈이 얼마나 크던지... 그 눈으로 날 쳐다보는데 기절할 뻔했어!"
결국은 그것을 밖에 놓아주었지만 아빠는 그날의 충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내게 매미를 살아있는 채로 잡아다 준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무렵의 한여름이었다.
우리 집 뒤에 큰 나무가 많아서 매미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크게 울렸다.
"매미는 종류마다 우는 소리가 달라. 근데 울지 못하는 매미도 있어."
"거짓말! 안 우는 매미가 어디 있어!"
"진짜야. 울음소리가 없는 매미가 있어."
나는 교과서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며 아빠를 거짓말쟁이 취급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하교를 하고 집에 들어섰는데, 나는 집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빠가 진짜 살아있는 매미를 잡은 것이었다.
매미의 몸통에 가는 실을 묶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이거 뭐야...?"
가까이서 본 매미는 실로 위협적이고 무서웠다.
크고 까만 그것이 내 책상 위에 얌전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훅 날아서 집 안 곳곳을 날아다녔다.
"악!"
나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매미의 공격적인 날갯짓 소리가 공포스러웠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엄마 뒤로 숨자, 엄마가 아빠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얼른 매미 놓아주고 와!"
나는 아빠와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안 우는 매미 있다고 했잖아!"
아빠가 매미를 잡았던 나무에 다시 올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매미가 울었는지 아닌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열심히 나무기둥을 기어올라가는 매미를 보며 생각했다.
'다시는 아빠 말에 거짓말이라고 안 해야지...'
그것이 내가 그날 얻은 교훈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부엉이를 잡아온 일을 그저 술주정이라 치부했지만, 나는 왜인지 아빠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잡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새를 잡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내가 달팽이를 마주치면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이어지는 감성.
그것이 지금의 오리를 바라보는 내 눈에도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그날의 진심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얼마 없는 아빠에게 그 한 조각 만은 영원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매미를 잡고 날 기다리던, 젊은 날의 아빠를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우리는 이어진다.
그때의 분위기와 대화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어, 늘 꺼내보고 싶은 추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