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Snow:雪)

낭만보다는 걱정이

by 산율

카톡 알림음과 함께 어머니의 새 작품이 도착했습니다. 어머님 그림 위에도 하얀 겨울이 왔습니다.

화면 가득 펼쳐진 하얀 화폭 위에는 작은 겨울 풍경 대신, 소복이 쌓인 눈을 묵묵히 치우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주인공처럼 서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그 자체보다, 그 풍경을 일구어내고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수고로움, 눈을 즐기기보다는 눈을 치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급한 마음이 전해집니다. 그 어머니 마음을 뒤로하니 문득 제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강원도 화천의 겨울이 떠오릅니다.


강원도 화천의 겨울은 유독 길고,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그곳에서 제설은 감상이 아닌 생존이었고, 또 하나의 지독한 훈련이었습니다. 연병장에 치워도 치워도 끝없이 쌓이던 눈. 때로는 포상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게 고된 훈련보다 잠시의 해방감을 주기도 했지만, 정비 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쏟아지는 눈발을 볼 때면 세상의 모든 하얀 것들이 미워질 만큼 지독한 짜증이 일기도 했습니다.


군대에서의 눈은 ‘쌓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낭만이 내려앉아 얼어붙기 전에 빗자루와 넉가래가 먼저 마중을 나갑니다. 덕분에 연병장과 포상에는 소복한 눈 대신, 언제나 깔끔하게 눈을 치운 흔적들만 남았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쌓인 눈은 더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내 발등 위에 떨어지는 눈은 당장 처리해야 할 또 하나의 작업이었습니다. 그래도 간혹 센스 있는 간부 덕에 연병장에 군가 대신 울려 퍼지던 유행가는, 추위를 잊을 수 있는 위로였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했습니다. 눈의 생리도 이와 참 닮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한없이 평화로운 순백의 세계이지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얼어붙은 빙판을 깨고 질척이는 길을 닦아내는 이에게 눈은 고단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 지겹던 제설 작업을 여러 번 하다 보면, 땀을 흘리며 눈을 치우다 보면 어느새 코끝에 스치는 바람의 결이 바뀌고, 어느새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그 길 위로 노란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며 봄이 옵니다.


과학의 시선으로 눈을 바라본다면, 눈은 지극히 중립적입니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0°C 이하의 찬 공기를 만나 얼음 알갱이로 응결된 후, 이들이 서로 뭉쳐 무거워져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이 눈입니다. 이 눈이 지상에 닿는 순간 지독한 주관적인 시간이 시작됩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설레는 낭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방해하는 거대한 장애물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당장 치워내야 할 버거운 짐이 됩니다. 주택에 사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계단에 쌓인 눈으로 연로하신 부모님이 행여 넘어지시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듭니다.


어머니의 그림 속에 화려한 겨울 풍경 대신, 묵묵히 눈을 치우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서 있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을 치우는 행위는 단순히 바닥을 깨끗이 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닐까? 그 풍경 속을 안전하게 걸어갈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까? 그런 어머님의 마음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젯밤에도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혹은 부모님의 집 앞마당에서 묵묵히 빗자루를 가지고, 넉가래를 가지고 눈을 치우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모든 분에게 눈의 아름다움보다 더 큰 ‘안전한 행복’이 쌓이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이 치운 그 길 위로, 가장 먼저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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