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생각해?

by E Hana

서울에 직장을 둔 사람들이라면 평일 저녁 7시에 강변북로가 얼마나 막히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강변북로는 러시아워로 꽉 막혀 있었다. 여름이 가까워진 탓에 해는 길어지고 차창 밖은 온통 초록으로 싱그러웠는데 운전대를 잡은 나는 똥줄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흔들기 1년 전쯤, 아들은 40개월을 조금 넘긴 시기였다. 하남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우리 세 가족은 남양주 덕소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 아들은 25개월부터 아파트 단지 내의 가정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이즈음 다시 영화사에 복귀했다. 육아를 허락하신 감독님 덕분에 나는 조감독 자리를 꿰차고도 반나절 근무에 퐁당퐁당 출근도 허용되었다. 다만 시공간을 구애받지 않는 핸드폰은 매일 불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당장 핸드폰과 노예계약을 맺었다. 물론 내가 을이었다. 감독님의 차고 넘치는 배려와 당신의 외조 덕분에 한 편의 영화가 꾸역꾸역 마무리되고 있었다.


한 번은 아들이 장염이 걸려 어린이집 등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장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 나을 때까지 가정 보육이 원칙이었다. 스텝회의가 잡혀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아이가 등원을 못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엄마 회사 갈래?” 아들은 엄마랑 빠~방타고 놀러 간다며 물개박수를 쳤다. 장염으로 설사하는 아이를 기저귀를 채워 일단 옆자리에 태웠다. 기저귀가방과 아이 간식으로 이것저것 챙기고는 목동으로 내달렸다.


아들은 삼촌이라 불리는 남자들 사이에서 한 시간씩 옮겨지면서 돌봄을 받았다. 큰삼촌은 컴퓨터로 뽀로로를 보여 주었고, 연출부 삼촌은 아들을 데리고 공원 산책을 다녀왔다. 조명 삼촌은 세종대왕이 그려진 용돈도 쥐어 주었다. 나는 두 시간마다 아이의 기저귀를 체크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것이 분명했다. 온누리에 사랑이 펼쳐지고 있었다. 삼촌들이 보여준 인류애로 인해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당신의 외조 또한 눈부시게 빛났다. 어린이집의 다른 친구들은 4시가 되면 할머니나 엄마가 집으로 데려가는데, 아들은 맞벌이를 이유로 연장보육을 신청한 터라 7시 하원이 가능했다. 그래서 내 아들 혼자만 4시부터 7시를. 3일 같은 3시간을 매일같이 견뎌야 했다. 저녁 회의가 잡혀 아빠가 데리러 가는 날이면 아들은 눈물이 그렁한 채로 “엄마는..?” 했단다. “아이 저녁 먹였어요!” 하시는 선생님께 멋쩍은 인사만 꾸벅했을 당신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 저녁이 당연한 게 아니라고, 아빠가 데려가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할 게 딱해서 먹여 주시는 거라고.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라도 드리지 그랬냐고 당신을 타박하려는 걸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엄마만 찾는 아들에 상처받고, 선생님한테는 면목없다는 당신 표정일 텐데.. 말해 뭐 하겠나. 퉁퉁 불은 아들을 어르고 달래서 씻기고 놀아주고 엄마랑 영상통화 시켜주고 애착인형 끌어와 간신히 재우고는 그제야 숨 쉬었을 당신을.


그러나 사고는 항상 긴장을 놓으려는 순간에 터진다. 영화사는 목동에 있었다. 결혼 전에는 친정이 있는 잠실에서 출근했기 때문에 올림픽대로를 뚫고 지나가는 한 시간이 그리 고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강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덕소는 달랐다. 목동에서 덕소로 가는 퇴근길은 양화대교를 건너 강변북로를 타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2시간이 지난 뒤 겨우 도착하거나, 목동에서 여의도를 지나 올림픽대로를 타고 엉금엉금 기어가기를 2시간쯤 지난 뒤 미사대교를 지나 덕소 IC를 빠져나오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영화는 후반작업 중에서도 마지막 단계였다. 감독과 헤드스텝 몇 명만 남아 편집과 사운드, 디지털 색보정 등의 영화 상영을 위한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낮에 DI실(디지털 색보정)에서 잡음이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영화 인력은 크게 촬영현장 스텝과 후반작업 스텝으로 나뉘는데 이 둘은 사소한 문제(주로 태도에 관한)로 왕왕 신경전이 벌어진다. 어떤 작업이고 필드와 데스크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거 중재하라고 조감독 자리가 있는 건데 이 날 따라 내가 묵은 감정을 드러내 버렸다. 이미 벌어진 일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나직이 일렀다. “회의실로 모이고 핸드폰 끄자..” 무거운 회의가 시작되었고 감독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회의실을 빠져나오면서 핸드폰을 켰다. 배꼽시계가 울린다 했더니 벌써 7시를 지나고 있었다. 아뿔싸! 어린이집은 7시에 문을 닫는다. 불 꺼진 어린이집에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울고 있는 아들. 굳게 닫힌 어린이집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안한 두 눈을 굴리며 엄마를 부르는 아들.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아들의 뒷모습까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순식간에 편도체가 후려갈겨졌다. 남편이 지방 출장을 간 날이란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아들의 하원을 책임지는 날이었는데 이 걸 잊고 있었다니. 나는 영화에 환장해 아들을 까먹은 정신 나간 엄마였다.


어린이집으로 전화부터 돌렸다. 가정어린이집이었으나 원장님 이하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퇴근하셨고 보조선생님 한 분이 아들과 함께 있다고 하셨다. 7시면 보조선생님도 퇴근하시는데 아마도 나를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고개를 연신 숙이며 9시까지는 어떻게든 가보겠다고 부탁을 드렸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부터 비상깜빡이를 켜고 액셀을 밟았다. 말 그대로 ‘비상’이었다.


강변북로는 어김없이 막혔다. 뉘엿뉘엿 해지는 창을 보며 엄마를 찾을 아들의 사슴 눈이 떠올랐다. 속은 타들어가는데 한강을 배경으로 펼쳐진 노을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두 눈이 뻑뻑해지고 가슴이 조여 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꼬박 두 시간을 달려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띠-잉-동- 천근만근 무거운 현관벨을 누르고 몇 초 뒤, 콩콩콩콩 아들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열리는 문으로 나이 든 보조선생님의 인자한 얼굴이 보였다. 다 이해한다는 미소와 수고했다는 말씀에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참았던 눈물을 꺼이꺼이 쏟아냈다. 아들이 선생님 뒤에서 폴짝 뛰어나와 “엄마, 나 선생님이랑 잘 놀고 있었어.” 씩씩하게 말했다. 눈물 콧물 범벅된 내 머리를 감싸는 조그만 아들의 가슴에 파묻혀 짐승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덕분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당신이 주는 안락함과 네가 주는 기쁨에 그 많은 상처를 잊고 있었다. 너를 힘들게 한 영화가 미웠다. 아버지! 나에게 사랑을 주세요! 수없이 외쳤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몸서리를 쳤던 내가 너의 사랑을 머리로만 채우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점철된 엄마의 욕망 때문에 ‘착한 아이’를 택한 너를. 대체 영화가 뭐라고. 나 자신이 비루하기까지 했다.


이 날 밤부터 너는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감기에 중이염까지 며칠 동안은 열이 올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엄마가 네 옆에 있어 좋은지 너는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눈에서는 꿀이 떨어졌는데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영화사에 간단한 사정만 얘기하고 사직을 고했다.


“엄마 이제 일 안 할 건데, 윤이도 어린이집 그만 다니고 엄마랑 신나게 놀래?”


꺄-악- 탄성을 지르고 올려다보는 너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너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엄마는 괜찮은 건지’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너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수만 번 되뇌었다.


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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