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월짜리 아들을 수술방에 두고 돌아서는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백일이 지날즈음 아들의 왼쪽 음낭에 물이 차면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는 걸 알았다. ‘음낭 수종’이었다. 생후 1년까지는 저절로 막히고 흡수되기 때문에 이때까지 지켜보다가 1년 이상 호전되지 않을 경우에는 탈장이 동반될 수 있어 수술을 한다고 했다. 아들은 퇴원 후 학령기가 되는 만 6세까지 신생아과 교수님께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를 받았는데, 첫 돌이 지나고 서울아산병원 내의 소아비뇨기과 검사를 진행한 후 아들의 수술이 결정되었다. 큰 수술이 아니라지만 이제 막 돌을 지난 아기를 전신마취를 시키고 수술대에 올리는 게 부모로서 결코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2015년 9월 22일, ‘아들의 컴백홈’을 온천지에 알렸다. 니큐(NICU) 생활 한 달 만에 친정집으로 데려온 아들은 <제다이의 귀환>보다 화려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외사촌형들의 꿀 떨어지는 환영 인사를 받으며 드디어 세상 나들이를 시작한 것이다. 2.3kg의 작은 아이였지만 누구보다 큰 사랑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아들이었다. 감사하게도 9월 27일이 추석이어서, 외갓집에서 당도 넘치는 귀염을 받으며 씨끌벅적한 명절을 보내고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추석이라는데 요 조그맣고 꼬물거리는 아들의 얼굴에는 이미 보름 달빛이 그득했다. 내 마음에도 한가위의 풍요로움이 넘쳐났다.
10월의 첫째 날에 드디어 아들을 안고 덕소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7월 말에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비워 두었던 우리의 보금자리에 두 달 만에 소중한 보물을 품에 안고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완전체라고 믿는 세 가족의 꽁냥 거리는 낭만은 잠시, 현실 육아가 펼쳐졌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안테나가 되어 아들의 희로애락에만 집중적으로 작동했다.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질 것 같았던 옥시토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코르티솔만 하루가 멀다 하고 샘솟았다.
신생아 배앓이 증상인 콜릭으로 아들은 새벽마다 속절없이 울었다. 잠옷인지 외출복인지 구분이 안 가는 무릎 나온 츄리닝은 이미 육아 현장의 유니폼으로 지정되었고 질끈 묶은 머리에 똑딱 핀으로 고정시킨 앞 머리,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나의 시그니쳐가 될 무렵 백일의 기적이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새벽을 깨우던 알람은 사라졌고, 우리 집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아들의 백일과 서른아홉의 내 생일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아들은 기특하게도 인고의 시간을 잘 견뎌내 주었고 한창때를 넘겨버린 피로한 나의 육체는 다행히 한계를 잘 버텨내고 있었다. 아들은 첫 돌이 지나면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걷기 시작했고, 생우유를 컵으로 마시기 시작했고, 물과 우유를 구분했으며, 아빠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10개 이상 말하고 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이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스러운지 나는 쉴 새 없이 ‘뭐야?’ ‘가자!’ ‘우와!’를 뱉어내는 아들의 조그만 입술에 수십 번 수백 번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16개월이 되면서 아들은 그림책에 집중하고, 음악을 들으며 물개박수를 치고, ‘사랑해’, ‘미안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린 아들 꽁무니를 쫓느라 꽁지 빠지듯 하루를 보내는 덕분에 민낯에 로션 한 번 바르기가 쉽지 않았지만 꽃보다 이쁘다며 나를 추켜 세우는 당신 덕분에 또 함박웃음을 지었다. 매 순간마다 긴장과 아쉬움이 함께 했지만 아들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에 크게 감동하며 매일매일을 느리게 살아 나갔다. 행복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수술 날짜를 받고부터는 시간이 더디게만 흘렀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하루가 일주일, 열흘이 한 달 같았다. 수술 전에 감기나 열 증상이 있으면 수술 날짜가 미뤄질 수 있기에 컨디션 조절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은 일절 삼갔다. 동네 마트에서 병원놀이 세트를 사 와 아들과 병원놀이를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아들의 수술에 대해 쉬운 말을 뱉어 냈지만 나는 하루가 갈수록 점점 더 예민해졌다.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간 말들이 가시 돋친 부메랑으로 되돌아왔고, 귀에 박혔고, 이내 원망으로 자리 잡았다. 아들의 밥을 준비하다가 동화책을 읽어 주다가 잠든 아들의 볼을 쓰다듬다가 문득문득 눈물을 쏟아냈다.
2017년 1월 25일, 이미 예정된 수술이었다지만 둥둥 걷은 환자복에 파란색 수술캡을 쓰고 안긴 아들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수술이 오후 2시로 정해진터라 전신마취를 위해 12시간 금식이 이어져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엄마가 왜 밥을 안 주는지에 대해 짜증을 내거나 징징 거리거리지 않았다. 소아 수술이기에 나도 초록색 수술복에 분홍색 보호자캡을 쓰고 아들과 함께 대기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의 수다가 오늘은 내내 잠잠했다. 병원 내에 유아를 위한 실내 놀이터가 있었지만 아들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때로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의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키와 몸무게를 측정하고 마취과 상담을 마친 뒤 안정실로 들어가 정맥주사를 놓았다. 혈관을 찾기 힘들어하는 간호사 선생님께 “니큐출신이예요” 했더니 이해했다는 듯 “아~” 하셨다. 주사를 많이 꽂으면 혈관이 약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들 인생 얼마나 됐다고 가시밭길이련가’ 생각하던 차, 의사 선생님이 오시더니 수술실로 함께 들어가자고 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컸으면 휠체어에 태워 들어가는데 너무 작은 아이라 나는 아들을 직접 품에 안고 수술실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니 <데드맨워킹>이 따로 없었다. 눈이 뻑뻑해져 몇 번이고 끔뻑거렸다.
수술방으로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계셨다. 낯설었는지 아들이 반사적으로 내 팔을 꽉 그러잡았다. 의사 선생님의 밝은 인사가 돌아왔다. 나는 아들과 눈을 맞추고 토닥토닥 쓰담쓰담 주술을 걸었다. 그러는 사이 의사 선생님이 주사약을 밀어 넣었다. 아들은 이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잠든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눈에 담고는 수술 침대에 내려놓았다. 수술방을 나와 대기실로 돌아서는 발걸음은 마치 거대한 납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했다.
아들의 이름이 불리면서 보호자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회복실로 들어가니 잠에서 깬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이고 내 새끼.. 다행히도 나에게 안긴 아들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웃으며 “엄마가 약이네” 하셨다. 회복실에는 우리밖에 없어 자장가로 매일 들었던 <Il libro dell'amore>를 들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도입부의 첼로 선율에 바짝 얼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주케로 포나치아리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설탕만큼 달콤했다. (주케로는 이탈리아어로 설탕을 뜻한다) 진정실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서로를 꼭 안고는 한참을 토닥토닥 쓰담쓰담 주술을 걸었다.
아들은 진정실에서 또다시 5시간의 공복 시간을 보냈다. 어른도 쉽지 않은 지난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아이가 아무것도 모를 때 수술하는 게 더 낫다고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다. 나의 슬픈 눈을 마주하자 아들은 곧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에게 아들의 존재는 신의 자비였다.
수술한 지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기저귀를 갈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이 아니라면 까먹을 정도로 아이는 밝고 씩씩했다. 전보다 때도 늘고 고집도 세졌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오래 담아 두고 팠던 혀 짧은 콧소리와 꽃 같은 아들의 미소가 담긴 사진을 보며 나는 오늘도 하루가 지남을 아쉬워한다.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