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집으로 가자

by E Hana

2015년 8월 21일, 나는 너무 작아서 안을 수조차 없는 아기를 낳았다. 33주 5일 만에 세상밖으로 나온 아기는 1580g이었다.


허니문베이비였는데, 임신 초기에 절박유산을 진단받고 서울아산병원으로 전원을 했다. 나는 서른아홉, 노산에 초산이었다. 외줄 타기처럼 불안과 걱정을 달고 살았는데 5개월째로 접어들면서 몇 번에 걸친 검사로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온전히 마음을 놓았다. 병원에서는 비타민을 처방받았고, 보건소에서는 철분제를 지원받았다. 초음파 사진으로 콩알만 하던 아기가 이제는 제법 얼굴이 보였다. 아들임을 확인하고 ‘꾀돌이’라는 태명이 적힌 산모수첩도 만들었다.


태교여행으로 슬로시티 증도를 다녀오는 길에 관촉사에 들러 은진미륵 앞에서 아기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다른 아기에 비해 일주일 정도 작지만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있다며 의사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다. 몸이 점점 무거워져 머리는 단발로 잘랐다. 이쯤 되니 나는 곰돌이가 되었다.


숙환으로 투병하시던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몸이 붓기 시작하더니 정기검진을 받던 날에 주치의 선생님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임신중독이라며 당장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예정일이 10월 3일이라 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입원이라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폭염이 시작되던 여름의 정점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위험산모실로 들어가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아기는 성장을 멈추었다고 했다. 엄마의 몸 안에서 위기를 느낀 아기가 살기 위해 머리만 키우고 있었단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혈압과 태동을 주기적으로 체크했고, 저염고단백식이 처방되었다. 아기가 가장 안전한 곳은 엄마 뱃속이니까 최대한 버텨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살아있는 인큐베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너를 살린다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속절없는 기다림이란 게 이런 것일까. ‘절대안정’을 공유한 비슷한 처지의 산모들이 커튼을 사이에 두고 묘한 긴장감을 주고받았다. 6월부터 메르스가 유행하면서 병원 내의 방역이 강화되자 지정된 1명의 보호자 외에는 병실 내 면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퇴근길에 당신이 알랭 드 보통의 소설책 2권과 충전기, 속옷을 가져다주었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는 당신의 슬픈 눈이 가슴을 후벼 팠다. 초음파 사진을 보며 꿀이 떨어지던 눈이었는데.. 혼자인 집으로 가기 싫은 눈치였지만 다른 산모들에게 미안해서 서둘러 쫓았다.


주말엔 머리감기를 신청해서 당신이 머리를 감겨준 덕분에 그나마 시원한 하루를 보냈다. 덤벨 들던 당신 근육은 요즘 나의 붓기를 주무르는 데 사용된다며 농담도 주고받았다. 매 끼니마다 식단은 달라지는데 맛은 당신처럼 한결같이 똑같다며. 이것도 콘셉트이지 했다.


혈압은 떨어지지 않고 전해질 불균형 상태에 이르자 갑자기 수술이 결정되었다. 금요일 새벽부터 나는 이동식 침대에 옮겨져 수술 대기실로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당신은 병실에서 대기했다. 수술방을 급하게 잡느라 분주해진 것 같았다. 아기가 있을 인큐베이터도 겨우 자리가 났다고 했다. 수술에 대한 공포보다 의료진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졌다.


수술방으로 들어간 뒤 척추 마취를 하고 누워 천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기를 품고 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가 지켜줄 테니 꼭 붙들고 있으라고. 절대로 너를 잃지 않겠다 수없이 다짐했건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너를 지켜내는 한 순간도 수고롭지 않았다. 너를 품을 수 있어 행복했으니 우리 제발 살아서 만나자.’고 빌고 또 빌었다. 아랫배가 갈라지고 오장육부가 당겨지는 느낌이 턱밑까지 느껴졌다. 조금 뒤 ‘히이잉-’ 하는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기인가요?” “네! 손가락 발가락 다 있고 건강합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간호사 선생님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초록색 포에 싸인 아주 작은 아기를 내 얼굴 가까이에서 보여 주었다.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너를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엄마야..’ 목구멍이 꽉 막혀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데, 의사 선생님의 싸인이 있었는지 아기에게 뽀뽀해 줘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너의 이마에 짧고 강렬한 키스를 남겼다. 뜨거운 눈물과 함께 옥시토신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깨어나보니 머리맡에 당신이 있었다. 마음은 이미 태릉 선수촌이었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기를 볼 수 없어 더 애가 탔다. 며칠을 더 중환자실에 있다가 일반병동으로 옮기자마자 링거를 끌고 ‘신생아 중환자실’인 니큐(NICU)로 갔다. 병원에는 2개의 니큐가 있는데(지금은 3개라고 한다), 아기는 니큐 1에 있었다. 니큐 1은 초미숙아나 고위험 신생아들이 집중 치료를 받는 곳이라 하루 한 번 밖에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한아아기’라는 이름표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눈에는 안대를 하고, 여기저기 주삿바늘에, 위에는 관을 연결시켜 놓았다. 인큐베이터마다 들리는 기계음 소리가 구슬펐다. “아가야..”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건지 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꾸만 입을 오물거렸다.


예약했던 산후조리원은 일찌감치 취소했고. 아기는 인큐베이터에, 나는 친정집에서 몸조리 아닌 몸조리를 했다. 다행히도 친정집이 병원에서 20분 거리여서 나는 아기가 있는 니큐로 유축한 모유와 함께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면회가 허락된 시간 동안 나의 사랑이 너에게 닿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동화책을 읽고 또 읽었다. 면죄부 없는 카르마를 짊어진 죄인이라는 생각에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거나 불만을 쏟아내는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신을 찾았던 것 같다. 그저 내 아기가 건강하게 퇴원하기만을. 이제까지 저지른 모든 죄에 용서를 구하고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방법도 모르는 기도를 누군지도 모르는 신께 기도했다.


퇴원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당신이 지방 출장을 간 사이 나는 부기가 채 빠지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 받은 출생증명서를 들고 주민센터로 달려가 아기 출생신고부터 했다. 너의 예쁜 이름이 적힌, 당신과 내 이름 아래에 적힌, ‘주민등록등본’을 어서 받아보고 싶었다. ‘가족관계증명서’는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했다. 중년의 여직원이 애 낳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아내에게 누가 출생신고를 시키냐며 당신 흉을 한참이나 보았다. 너의 ‘출생신고서’에 꾹꾹 눌러 담은 나의 감동을 오늘의 내 필체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당신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20년 같은 2주가 지났을 즈음에 너는 드디어 니큐 1에서 니큐 2로 자리를 옮겼다. 니큐 2로 옮긴다는 건 하루 2번의 면회가 가능하고, 모유 수유도 가능하고, 캥거루 케어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드디어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의미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를 보려고 니큐 2로 서둘러 갔더니 이미 다른 부모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하며 기다리는데 아기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니 여기저기서 울음이 떼창으로 쏟아졌다. 면회 시간임을 본능으로 느끼고 알은체를 하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 빨리 들어오라고. 손을 씻고 방문자 면회가운을 입는 몇 초 동안에도 애간장이 녹았다. 니큐의 문이 열리고 종종걸음으로 너에게로 가니 내 발소리를 직감했는지 너는 눈을 반짝 떴다. “아가, 우리 추석 전에는 꼭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온 가족의 축복을 받자고 속삭였다.


아들이 니큐 1에 있을 때 옆 자리의 아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몸이 퉁퉁 붓고 새까맣게 변한 아기 앞에서 한없이 울던 엄마와 아빠의 뒷모습을.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들이 니큐 2로 이동하던 날, 옆자리의 아기는 결국 천사가 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숙연함을 느꼈다. 다시 한번 주어진 우리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겠노라고 다짐했다.


임신을 축하한다며 배냇저고리를 선물해 주신 고등학교 은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아기가 태어나면 매일매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씀. 오늘도 나는 그 기적과 함께 또 하루를 힘차게 달린다.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이미영교수님, 신생아과 김애란교수님, 니큐 2의 노성은 간호사님, 신생아 중환자실의 간호사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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