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겠습니다

by E Hana

내 나이 삼십대로 접어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삼포세대(三抛世代)였다. 삼포 세대는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청년세대를 일컫는다. 여기에 더해 오포세대(五抛世代)는 자기 계발과 내 집 마련까지 다섯 가지를 포기한다. 나는 4대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비정규직 영화 노동자였기에 통장 잔고는 늘 바닥이었다. 나에게 오포는 디폴트값이었고 칠포는 선택이었다. 칠포는 대인관계와 희망을, 구포는 신체적 건강과 외모를 포함한다. 더 나아가 십포나 완포세대(전부 포기 세대)는 생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극의 절정에 이른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냐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덕분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영화가 예술이라는 낭만보다 퇴직금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날카로운 현실이었다. 그런 내 인생에 남들이 ‘그냥’ 누리는 건 나에게는 ‘사치’였다. 무지개 찬란하던 당신의 광배에 홀딱 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허세작렬하는 결혼식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청춘들도 이것저것 다 포기하는 이 시대에 깨어 있는 결혼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나는 실리주의자였다. 가족들만 모시고 결혼하겠다는 내 말에 엄마는 본전 생각으로 뒷목을 잡았고, 친구들은 재혼이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세상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했다. 대체 무엇이 옳고 그르단 말인가. 당신과 내가 마치 부도덕한 행위를 선도한 것처럼 죄책감을 던졌다. 그들은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자기중심적 생각이라는 것을 몰랐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데 야박한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나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희망하지 않았던 것인데, 희망하지 않는 것과 포기는 다른 문제였다. 지인들에게 뭐라고 하냐는 엄마의 툴툴거림에 뭘 구구절절이 설명하냐고, 그냥 딸아이가 돌아이라 그러라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류의 삶이 더욱 성숙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나는 결심했다. 내 결혼식이었다.


우리는 석촌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의 2층 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레스토랑 대여비는 없었고, 식사값만 지불하면 되었다. 예물, 예단, 폐백 3종세트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네 번째 손가락 외롭지 않을 금반지 하나면 충분했다. 당신의 보타이와 슈트는 반나절 만오천 원으로 샵에서 빌렸다. 나는 웨딩드레스 대신 하얀색 블라우스와 그에 어울리는 벌룬스커트를 주문했다. 십만 원도 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둘 다 평소 신던 구두를 반짝반짝 광을 내어 신었고, 아침 일찍 동네 미용실에 들러 드라이를 부탁했다.


레스토랑의 통유리로 들이치는 햇살 덕분인지 당신 모습에 눈이 부셨다. 예쁘다고 속삭이는 당신에게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All You Need Is Love’의 첫 구절 러브, 러브, 러브가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의 첫걸음 알렸다. 영화 <Love Actually>의 삽입곡이었다. 나는 당신을 팔짱을 낀 채 가족들이 앉은 테이블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버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백번 잘했다고 칭찬하는 엄마의 마음을 눈으로 받았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들이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룸 밖에서도 들려왔다. 신부 화장에 대한 타박도, 웨딩드레스에 대한 품평도 없었다. 우리는 고스란히 축복받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며칠을 고민하며 함께 만든 성혼선언문을 낭독했다.


웃음이 많아졌습니다. 더불어 눈물도 많아졌습니다. 때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짜릿했습니다. 그리움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목소리만 들려도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많이 사랑하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 소중한 가족들 앞에서 맹세합니다. 신랑이 대머리가 되더라도 언제나 사랑하겠습니다. 신부가 아침밥을 안 해주더라도 언제나 감사하겠습니다. 성실과 검소함이 미덕인 동시에, 지혜로운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부의 말을 항상 경청하고 가정의 중요한 일들을 함께 결정하겠습니다. 평생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꿈을 공유하고 이룰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끝까지 오래 살아서 마지막까지 신부를 지켜주겠습니다. 오늘의 이 다짐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며, 우리 두 사람 평생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합니다.

하루하루 넘치는 사랑을 주는 당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걱정과 위로에서,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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