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을 땐 돌아보지 마

by E Hana

인생은 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선택은 인생이고 그로 인한 결과는 우리의 삶이다. 영화와 헤어질 결심을 한 건 당신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을 저울질해서 선택할 만큼 나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다.


4년 넘게 다녔던, 내게는 기적과도 같았던 긴 시간을 보낸, 영화사에 드디어 사표를 던졌다. 한순간의 감정으로 촉발된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순간들이 있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하면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스무 살부터 치열하게 고민했던 원초적 질문들이 끊임없이 부유하며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영화인은 대부분 프리랜서다. 카메라의 앞에 서건 뒤에 서건 처지는 같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고를 버티던 15년 차 무명배우가 어느 날 위대한 감독님의 선택을 받고 위대한 작품에 캐스팅되어 대배우와 함께 작품을 하고 난 뒤 드디어 많은 작품에 캐스팅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유명배우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주는 이야기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스텝들도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하면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누구는 기회를 잡고 누구는 기회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쓸쓸히 늙어간다.


일본의 어느 위대한 촬영감독의 회고전을 본 적이 있다. 열 편이 넘는 작품을 보는데, 영화를 전공한 나조차도 단 한 작품도 아는 영화가 없고, 흥행한 작품도 없고, 심지어 재미도 없었다. 이렇게 뛰어난 영상미에 반해 내러티브가 빈약해 전혀 집중할 수 없었던 무수한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다. 대중에게 결코 회자될 수 없는 마에스트로의 회고전을 전공자들 몇몇이 앉아 공유하는 감정이 비단 슬픔뿐이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영혼과 통장을 갈아 넣은 단편영화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던가, 운이 좋아 흥행하는 작품의 스탭을 하던가, 더 운이 좋아 위대한 감독님의 작품에 스태프로 참여해서 나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일용직이나 백수로 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에 모두 부합하더라도 마흔 전에 씁쓸한 기억의 저편으로 고이 접어 보내고는 다른 삶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내 주변에는 많다. 전국의 영상 관련학과에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수시로 세상밖으로 토해내기 때문이다.


나도 같은 이유로 내 가난한 영혼과 천만 원짜리 통장을 갈아 넣어 단편영화를 만들었으나 영화제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내 인생에 흥행한 영화는 없었고, 위대한 감독님? 음... 나 자신을 증명하는 이력서에는 제목만 아는 영화 몇 줄이 촬영팀 반, 연출팀 반으로 나뉘어 채워져 있었다. 한 사람의 능력을 고작 몇 줄의 이력서로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 알지만 그런 이력서들은 어디에도 넘쳐났고 일일이 다 만나서 사람을 알아보기에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나는 서른을 훌쩍 넘기고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한 영화사에 적을 두기 시작했는데 매달 입금되는 월급은 달콤함 그 자체였다. 보통의 영화인들은 작품 당 계약을 하기 때문에 촬영이 없는 기간에 돈을 받는다는 건 기적이다. 적어도 내가 일하던 충무로 시절은 그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를 보는 가족들의 시선부터 달라졌다. 그러나 준비하는 프로젝트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현장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작품의 옥석을 가리는 눈조차 희미해졌다.


몇 년 만에 가까스로 크랭크인을 알린 영화는 개인적 취향과 정서에 반하는 작품이었기에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창작의 욕구는 제로였고 의견 개진도 힘들었다. 단순히 입력을 하면 출력을 해내는 기계처럼 지시에 따르고 복종했기에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순간 월급의 노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 자신이 떨어지는 낙엽보다 하찮게 느껴졌다. 나는 잉여 인간이고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고 싶었다. 어쩌다가 내 삶이 이 지경까지 왔는가. 기분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바닥을 쳤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하더니 내 안의 속물근성에 검은 뱃속이 울렁거렸다.


어서 오라는 당신의 전화에 서둘러 짐을 챙겨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강원도의 봄바람이 이미 허파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일을 마친 당신이 터미널로 마중을 나왔다. 모세혈관으로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오래된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주로 시킨 술이 입으로 들어가니 술은 곧 말이 되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영화사 그만뒀어.”


해변가 작은 마트에서 폭죽세트를 한 아름 사가지고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백사장으로 향했다. 나는 취한 걸음으로 겨우 숨을 몰아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른 봄바람이 피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운 짠내... 당신은 단발 폭죽을 일렬로 나란히 세워 꽂고는 불을 붙였다. 타다닥 탁 탁. 까만 밤하늘에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불꽃은 신비로움과 함께 애틋함마저 자아냈다. 하나의 불꽃이 꺼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불꽃들이 솟아올라 칠흑의 시간을 울긋불긋 수놓았다. 불꽃의 짧은 순간은 화려하게 세상을 밝히지만 어김없이 더 큰 어둠을 낳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의 텅 빈 어둠. 이미 사라져 버린 불꽃에 왠지 모를 서운함과 서글픔으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루하고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내 영화에 대한 기억,

엉망진창이었지만 모두가 진심이었던 순간들,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다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추억,


그런 이유로 영화는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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