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첫 문장 中
내 삶도 그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서른아홉의 나이엔,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내 작품을 준비하느라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리라고 상상했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스무 살 무렵 인생이 점점 복잡해질 거라는 예감과는 달리, 내 인생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 방학숙제로 만들었던 생활계획표만큼이나 단순해지고 있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영화에서 피력했던 것처럼 내 삶은 깨어있는가.
뷰파인더에 세상을 담으려고 한 것 주의를 기울이던 그 시절, 나는 영화과에 입학했었다. 동기들과 동지애를 부르짖으며 애수를 쏟아내고 낭만을 팔았다. 앵글에서 포커스가 흔들리는 순간이 내 삶의 연속성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깨어있었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믿었다.
벚꽃이 초속 5cm로 떨어지는 어느 날,
영화가 나를 냄새나는 시궁창으로 끌고 들어가던 어느 날,
푸른 안개의 심연 속에서 무지개를 만난 것처럼 당신을 만나 내 삶을 안심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서른아홉에 나는 시나리오 대신 ‘엄마’하고 부르는 이 귀한 아이를 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다 잊어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안쓰러운 시선도, 솟구치는 의심에 무심코 내뱉은 나의 한숨도 다 잊어버렸다.
어느 날부터 나에게서 바람이 불었다. 그로 인해 아이의 꿈이, 희망이, 미래가 함께 날아올랐다. 아이가 엄마엄마하며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엄마’였다. 이 아이 덕분에 나는 아주 미미한 사건에도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는 당신이 주는 안락함과 아이가 주는 긴장감이 행복이라 믿었다. 지금이, 이 시간들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흐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실 창 너머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잔인한 봄 탓에 나도 깨어나는가 보다. 더 이상 날지 못하는 퇴화된 내 겨드랑이 밑 살점들이 또다시 움틀거린다. 나도 날고 싶다고. 미래의 삶 어딘가에 아직도 그 시절 품었던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그 너머의 삶의 끈을 아주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는데.. 한참 생각한다.
‘엄마’하고 부르는 날에 난 다 잊어버렸단다.
철없던 나이도 꿈 많던 나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