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쭈나라의 까끌이요정

by E Hana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까끌까끌...


무슨 소리냐고? 아들이 내 티셔츠의 목 솔기 부분을 잡고 손톱으로 긁는 소리다. ‘까끌까끌’은 표면이 매우 거칠고 깔끄러운 모양을 뜻하는 부사지만 우리는 이 행동 자체를 ‘까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멜라토닌이 뿌려지는 밤마다 아들은 잠들기 위한 의식으로 약 3분에서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손톱으로 느끼고 귀로 즐기다가 마음의 안정을 취한 뒤 곯아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아들은 저녁마다 나에게 묻는다. “엄마 오늘 밤에 까끌이티 입을 거야?” ‘까끌이티’는 손톱으로 솔기를 긁는 ‘까끌이’가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 1, 2, 3번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티셔츠는 목부터 늘어나기 마련인데 아들의 이런 의식 덕분에 내 티셔츠는 몇 배나 빨리 사망선고를 받는다. 그러면 아들은 세상 잃은 눈빛으로 사망한 티셔츠를 안고 아직 미련이 남은 목 솔기를 손톱으로 한참 긁다가 이내 포기한 듯 내게 넘긴다. 찰스 M. 슐츠의 4컷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루시의 동생 라이너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지혜로운 아이다. 하지만 늘 애착담요를 안고 다닌다. 라이너스에게 담요는 중요한 물건 이상이다. 내가 ‘라이너스의 담요’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아들을 괴짜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진작에 병원에 데리고 갔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25개월부터 아파트 단지 내의 가정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이즈음 다시 영화사에 복귀했다.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아들은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겨났다. 우리 집에는 결혼 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인형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신기하게도 이 인형만을 고집했다. 감은 두 눈에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가늘고 긴 팔다리에 점프슈트를 입은 우아하게 생긴 60cm 정도의 아이보리색 양 인형이었다. 아들은 ‘눈깜깜양’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나에게는 그저 무명 씨였던 인형이 아들에게는 ‘눈깜깜양’이라는 세상 귀한 친구가 되었다.

내가 다시 영화일을 접고. 아들은 다니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당신은 개미, 우리는 베짱이의 삶을 시작하면서 시간이 넘치는 엄마와 아들은 매일같이 깨를 볶았다. 공원에 나가 꽃구경도 하고, 나비 쫓아 뜀박질도 하고, 도서관에서 그림책도 읽고, 고사리 손으로 울퉁불퉁 반죽해서 쿠키도 만들고, 옆구리가 터진 꼬마김밥도 만들어 먹었다. 거실 바닥에 전지를 깔아놓고 크레용과 물감으로 정체 모를 그림도 그렸다. 아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나는 우리가 사랑한 이 태평성대의 시간들을 잊지 않으려고 장기기억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2018년 10월 남양주 덕소에서 미사로 이사 오고 난 뒤, 아들이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은 아이라는 걸 알았다. ‘눈깜깜양’의 시대가 저물고 드디어 ‘까끌이’의 시대가 열렸다. 이때 아들의 나이가 4살이었다. 덕소의 아파트는 1층이었고 이사 온 미사는 25층이었는데 아들은 “엄마, 아파트가 무너지면 어떡하지?” “지진이 나거나 불이 나면 25층에서 어떻게 대피해?” 하는 질문을 쏟아냈다. 그네도 혼자서는 타지 못했고 높은 미끄럼틀은 쳐다보지도 않았기에 놀이터보다는 주로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성남에 서울공항이 있어 미사의 하늘엔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자주 날아다녔고, 그럴 때마다 아들은 귀를 막고 내 뒤로 숨기에 바빴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세상은 아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생활 소음은 신기하게도 밤에 더 큰 소리를 냈다. 째깍거리는 시계는 곧장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뜬금없이 괴상한 소리를 내는 공룡 장난감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불 꺼진 거실에 혼자 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밤에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간다거나 화장실에 갈 때에는 온 집안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몇 번의 파이팅을 거듭하고 용기를 내어 도전했지만 아들의 눈에서는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들의 날개가 힘을 잃어 축 늘어지자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생활소음이 불편한 아들이 딱 하나 관심을 보인 건 피아노였다. 우리 집에 오래된 디지털 피아노가 있었는데, 아들은 심심하면 뚜껑을 열고는 제일 아래 건반의 라부터 제일 위쪽 건반의 도까지 88개의 음을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눌러 가며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럴 때면 아들의 날개가 빛을 내며 파닥파닥 생기가 돌았다. ‘네가 반한 세상의 첫 번째 소리구나’ 싶었다. 그리하여 2018년 12월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세상엔 불편한 소리도 많지만 아름다운 소리도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들의 청각 능력이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풀배터리검사를 진행한 뒤에야 알았다. 검사는 단순히 아들의 지능 지수만이 아닌 성격과 기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다행스러운 건 아들의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함께 공원에 나가면 ‘엄마껌딱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래의 친구들과 금방 친해져서 뛰어놀았다. 공기를 청명하게 가르는 아들의 웃음소리는 나의 유일한 비타민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친구들을 따라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고 높은 미끄럼틀에 올라가 숨바꼭질도 하고 정글짐에도 스스럼없이 기어올랐다. 아들의 성장은 날마다 기적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은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안아줘!”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엄마 기분을 살피는 아들을 보면서 내가 먼저 두 팔 벌려 “충전!”을 외쳤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한 우리 가족의 삶을 위해 잠자기 전 의식 하나가 추가되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우리는 서로를 꼬옥 안아주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까끌이’와 ‘충전’은 아들 키가 벌써 내 턱밑까지 쫓아온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손잡고 뽀뽀하고 안아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라니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가끔 아들에 집중한 나머지 당신의 존재를 잊어버려 질투와 원망 섞인 당신의 눈빛이 느껴질 때면 우리의 의식에 당신을 끼워 완전체를 이루기도 했다.


불안이 높고 예민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감각적으로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타고난 아들은 엄마가 힘들 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하고 아프면 보살필 줄도 안다. 조금 더 자라면 진지한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나눌 수 있다. <피너츠>의 작가 찰스 M. 슐츠는 라이너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라이너스는 나의 진지한 면을 가진 캐릭터다. 집 안의 학자인 라이너스의 성품은 밝고 똑똑한데, 아무래도 이런 성격이 라이너스의 불안감에 일조하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라이너스가 담요를 들고 다니지 않는 시기가 오는데, 작가는 라이너스가 애착담요를 극복했다고 설명한다. 나의 아들도 ‘까끌이’를 극복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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