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쌩백수는 아닙니다만
지난 주 후반, 드디어 희망퇴직 승인사인이 떨어졌다.
사인이 난 후 내가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일단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으며, 너무 기쁘고 좀 논다고들 했다.
나는 신기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그냥 일단은 좀 멍했고, 그 뒤로는 그냥 걱정 반 아 몰라 반 이 상태다.
블라인드에서는 목돈을 챙겨 희망없는 회사를 떠나는 희망퇴직자들이 배가 아픈건지,
무능력자라는둥, 그래도 부럽다는 둥, 나도 희퇴시켜달라는 둥 온갖 소음이 난무하다.
사실 희망퇴직자들에 대한 의견은 반만 맞다고 보는게 맞겠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인건가. 평소 좀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 이번 기회에 꽤나 많이 퇴사를 하는 바람에
희망퇴직을 신청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나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동료들의 비탄에 찬 고백들을 꽤나 들어주기는 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꽤나 인정받고 있었던 재원들이었다. 솔직히 나만해도 얼마 전까지 회사에 리텐션이 묶여있던 핵심인재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완전 아가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내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내 주변 사람들이 회사에 로열티도 높고 능력도 출중한 사람들었더라.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이건 뭔가. 현타가 아주 세게 왔나들 보더라.
결국 뭐라도 되겠지 하며 약간의 자신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과 정말 오갈데 없어 밀려나는 사람이 아무도 알 수 없는 비율로 섞여 있는 것 같다. 다들 자기가 전자라고 주장하면서.
반면에 나는 희망퇴직 누를때까지만 해도 룰루랄라 너무 신이 나서 완전 뇌가 청순하게 주름이 쫙 펴져 있었달까. 원래 이 회사에 오고싶은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우연히 들러 그래도 커리어를 좀 펼쳐볼까 했더니 참으로 거지같아서 난감해지려던 찰나 침 퉤 한번 뱉고 떠나면 끝인 것, 심지어 깽값까지 쳐준다 하니 땡큐베리마치 아닌가. 아무런 망설임도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그러니까 마침 퇴사를 할 작정이었는데 돈까지 준다고 하니까 우와 이게 뭔가 하는게 내 입장이었달까.
그런데 우리 모두 알고있지 않은가. 이번에 희망퇴직자가 500명이 넘는다고들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그러면 판교에 치킨집이 500개 생기는 거냐고들 하더라. 이 얼어붙은 인력시장에서 40줄에 넘어선 화이트칼라를 쉽게 받아줄 데가 있을까. 이성적으로 말해 그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누군가는 자영업을 할 거고, 누군가는 재테크를 할 거고, 누군가는 망할 것이다. (아 참고로 나 개발자 아님. 이 회사에서도 개발부서 아닌 다른 부서로 입사했고, 의외로 이건 아는 사람만 알던데 우리회사 특정 몇몇 부서는 고학력자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알음알음 동문회처럼 삼삼오오 무리가 생긴 것)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뻗쳐 버리자 갑자기 새벽에 다시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되려 이미 아쉬움까지 다 떨쳐버린 내 주변 사람들은 재취업이고 나발이고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후련하다며 외국여행을 알아보고 있던데 나는 그냥 걱정만 하면서 전기장판 위에서 오도카니 웅크리고만 있다.
그래서 재취업 어쩔 건데. 원래부터 회사는 그만 다니기로 생각은 했지만 그게 내 의지가 한 반만 섞인 결정이니까 찐따같고 루저같고 아니 그래도 한번만 더 그럴싸한 회사를 다녀볼까 싶고 그냥 아주 걱정이 다시 바리바리 영글었다.
한편 남편은 더더욱 잘 나가게 되어서 얼마 뒤에 뭐 아무튼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부부동반으로 오라고 해서 백이나 좀 사달라 이러고 있는데 남편이 '잘 생각해봐 너 집에 샤넬 몇 개 있어' 이러는데 옷장 뒤에 웅크리고 있던 우쿨렐레를 꺼내서 '빽사줘~' 한소절 치니 남편이 너는 참 베짱이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그동안 회사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하더라.
그래 나도 안다. 나 노는거 진짜 좋아한다. 근데 근심을 곁들인 그런 모범생 베짱이라 마음 편히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참으로 좀스러운 것이다.
오늘은 안정제 없이 자보도록 노력해야겠다.
의사선생님이 자낙스는 필요할때만 먹으라고 했다.
시발 회사 그게 뭔데. 밥벌이 알게 뭐람.
나는 성격이 팔자라는 말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