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압박
역사학계에서 대비되는 두 거장이 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헤로도토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더라"
식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전설도 기록으로 남겼다.
반대로 투키디데스는 기자였다.
냉철하게 조사하여 확인된 사실만을 기록으로 남겼다.
역사학자들끼리 하는 토론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가 헤로도토스를 칭송하지만 본인이 어느 쪽이냐 묻자
"투키디데스 쪽이죠"
라고 답했다.
당연한 대답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보고 투키디데스의 방식으로 실증하는 것이 현대 역사학자의 자세일 것이다.
예술계로 들어와도 비슷한 논쟁은 계속된다.
사실 그대로를 담아 전달할 것이냐.
그 사실을 실제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달할 것이냐.
영화 '300'은 역사적 고증 오류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전쟁터의 참상을 실감 나게 전달해 준다는 면에서 완전히 엉터리는 아닐 수 있다.
투키디데스처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헤로도토스처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일상대화에서 꽤 좋은 덕목일 수 있다.
3.1절을 맞이했다.
전담강사, 심리상담가, 모임자, 나로 구성된 단톡방에 이벤트 공지가 올라왔다.
'3.1절을 맞이하여 OO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태극기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세요'
내가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데,
자가용으로 함께 이동을 요구하면 거절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앞유리에 '아파트 차량출입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주소가 노출될 수 있다.
'동호수만 공개되지 않는다면 괜찮을까?'
다행히 끝내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여러 스케줄들을 고려하여 3.1절 당일에는 만나지 못하고 다음날 모이게 됐다.
이번엔 전담강사가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고 심리상담가는 건강상 불참을 선언했다.
장소에 도착하니 전담강사, 모임장이 마주 앉아 있었다.
긴장도를 끌어올렸다.
전담강사는 모임장과 다르게 충분한 데이터로 나를 파악할 수 있다.
포교실패, 포교성공을 수 없이 반복하고 사례를 학습했을 것이다.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적당히 넘어가는 척하거나 최소한 반감을 사지 않을 만큼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간단한 인적정보를 시작으로 탐문이 이어졌다.
스파이 영화의 대화장면처럼 질문들이 하나같이 무언가의 암시로 느껴졌다.
그녀는 내 불행을 유도하고 내가 속으면 성스러운(가증스러운) 말로 후속타를 날릴 터였다.
후속타가 들어오면 얼굴이 뭉개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나도 암시로 대응하여 후속타를 겨우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담강사 "어떨 때 기쁘다고 느끼세요?"
(말씀 공부야말로 진짜 기쁨의 길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나 "행운이 터졌을 때 기쁘다고 느끼죠"
(기쁨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운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모임장 "그건 진짜 행운이고 뭔가 '이거 할 때 재밌다' 이런 거 없어?"
나 "요즘은 기록 정리가 재밌긴 해"
전담강사 "평소 주변 친구들이 본인을 어떻게 표현하세요?"
(외톨이 아닌가요?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나 "최근에 친구는 제가 감정이 메말라 있다고 하더라고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모임장 "아닌데? 표현을 들어보면 엄청 감성적일 때가 있는데?"
전담강사 "감정이 없는 건가요? 표출을 안 하는 건가요?"
(사실은 감정 표출을 못 해서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나 "감정이 없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다만 분노나 불만은 자주 참긴 합니다."
(제가 참고 있는 스트레스는 이해 못 할 인간들에게서 느끼는 분노뿐입니다.)
전담강사 "분노나 불만은 언제부터 생겨났다고 느끼시나요?"
(어린 시절 힘든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위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나 "아마 선천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쓴 시를 봤는데 불만이 가득하더라고요"
(내 성격은 오로지 나로 인한 것이지 어릴 시절 핑계 댈 생각 없습니다 )
전담강사 "어떤 시였는데요?"
나 "친구들이 오락실을 더럽게 쓰는 거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전담강사 "성격이 정의감이 많은 편인가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더 큰 정의(신앙)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지 않을까요?)
나 "정의감은 없어요. 저는 누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면 어떨지 물으면 친일파를 할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모임장이 못 말린다는 듯이 웃는다.
전담강사 "그럼 존경하는 분은 없나요?”
(정의감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역시 더 큰 정의를..)
나 “안중근이요”
일동 폭소.
깽판이었다.
앞 뒤가 맞지 않는 말로 애초부터 웃길 생각이었던 듯.
지금껏 어떤 말이 진심이고 장난인지 뒤집고 섞어버렸다.
분위기를 흐렸다.
잠시 소강상태가 있고 난 후 모임장이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친구들하고 자주 통화 한다고 했는데 이 모임에 대해선 뭐라고 해?”
‘떠보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거짓말엔 재능이 없다.
핵심만 숨긴 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응원하는 친구, 비판하는 친구, 중립인 친구 각각 있지”
전담강사가 뒤이어 분명한 경고로 보이는 말을 보탰다.
“그런 부분이 저희가 평소에 조심해 달라고 부탁드리긴 하거든요.
이게 교육자료다 보니 유출되면 조금 위험한 부분이 있어서요. “
아무래도 노트를 사수하여 집으로 가져간 건, 평소 기록습관, 친구와 자주 통화한다는 점 등을 종합해, 상당히 껄끄러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 너스레로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상당히 위험한데요? “
외부소통으로 인해 세뇌가 실패할까를 우려한 거짓 경고였겠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다.
실제로 내가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