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셈블리 홀에서 내려다보는 신시가지 전경도 그림 같다. 빈티지한 개성이 있다. 로마시대부터 명성을 떨친 바스Bath가 노란빛 바스 스톤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에딘버러는 검은빛 사암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고풍스러운 풍경 속을 걸어 들어간다. 완만한 경사를 가진 잔디밭 아래로 길고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그 아래엔 그리스 신전을 닮은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Scottish National Gallary이 앉아 있다.
미술관 옆 공터에 공연장이 차려졌다. 이오니아식 기둥을 배경으로 삼았다. 셔츠 차림에 멜빵을 두른 말끔한 청년이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양 손을 몸에 밀착시키고 뒤를 가죽 끈으로 묶는다. 구경꾼 몇을 불러낸다. 묶인 상체를 비틀며 외발자전거에 힘겹게 오른다. 위태롭게 몇 바퀴를 돈다. 그 와중에 묶은 가죽 끈을 하나씩 풀어헤치더니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신통방통하다. 놀라움을 선사한 값으로 1파운드를 바구니에 담는다.
미술관 옆에는 미술관과 닮은 건물이 딱 붙어 있다. 왕립아카데미The Royal Scottish Academy 건물이다. 쌍둥이 같던 두 건축물의 차이를 아내가 발견한다. 건축물 상부를 받드는 원기둥 머리 장식이 전혀 다르다. 미술관은 이오니아식, 왕립아카데미는 도리아식이다. 미술사적으로 도리아 양식은 이오니아 양식보다 앞선다. 건물도 십여 년 앞서 지어졌다. 검게 그을린 외벽만 보면 백 년은 더 오래된 것 같다. 아마도 도로와 접한 까닭에 노화가 앞당겨진 모양이다.
나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미술관도 왕립아카데미도 플레이페어가 지었다. 이제 신고전주의 건축물만 보면 저절로 눈을 흘기게 될 것 같다. 졸부의 경솔함이 도시의 고결함을 훼손한 것만 같아 불편하다. 에딘버러 신고전주의가 플레이페어와 동의어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북쪽의 아테네’라는 어설픈 기획부터 기금이 고갈되는 사태에 이른 1800년대 초까지 에딘버러는 혼돈의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쌍둥이 건물 앞에는 작은 상점들이 차려졌다. 크리스마스 마켓 같은 분위기가 공원이 있는 프린세스 거리까지 이어진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상점에서 스콧 기념탑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무 위로 꼭대기만 빼꼼 내민 탑을 이정표삼아 작은 오솔길로 들어선다. 길은 웨이블리 역까지 이어진 오래된 공원과 작지만 정갈한 정원을 가른다. 노천 카페와 멋진 조각상 몇 개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었더니 어느새 스콧 기념탑이다. 61.1미터 탑을 온전히 보려니 고개가 완전히 젖혀진다.
2.
월터 스콧Walter Scott 경, 스코틀랜드 국민작가를 기리는 탑은 화려하다. 고딕 스타일의 수많은 첨탑들이 신고전주의에 진저리난 눈에 생기를 돋운다.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날렵하고 가볍다. 저 속에 287개나 되는 계단을 감추고 있다니 더욱 놀랍다. 탑 꼭대기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은 탑을 네 개 스테이지로 나눈다. 각 스테이지에선 에딘버러 구도심과 신도심을 360도로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호사를 부릴 수가 없다. 하필 내부 관람을 통제하는 날이다.
검게 그을린 것같은 빈티지한 이미지는 가까이에서도 매력적이다. 돌은 에딘버러 인근 에클레스마칸Ecclesmachan 마을에서 채석한 것이다. 예부터 좋은 돌 생산지로 명성을 얻은 이 마을에는 무려 6개가 넘는 채석장이 있다. 특히 조각에 안성맞춤인 사암 성분 돌로 유명하다. 비니 스톤Binny Stone이란 이 돌은 역청이라는 물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그 자체로 검은 빛을 띤다. 아스팔트에 쓰이는 찐득찐득하고 시커먼 물질이 바로 역청이다. 스콧 기념탑이 풍기는 독특한 아우라에 8할은 원재료의 질감 탓이다.
첨탑을 지지하는 외곽 기둥 4개엔 스콧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작품을 읽은 적 없으니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를 기리는 탑에 작가 분신을 담은 아이디어는 괜스레 감동적이다. 기둥 가운데는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는 작가와 애견 마이다Maida 조각이 놓였다. 그런데 유독 이 조각만은 하얗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카라라Carrara 지역에서 가져온 대리석이란 정보는 밝혀 놓고,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서 여기로 싣고 온 그 마음은 적어 놓지 않았다. 조각가는 존 스텔John Steell이다. 극명한 컬러 대비 덕분에 스콧과 마이다는 눈처럼 희다.
기념탑을 만든 이가 궁금해진다. 설마 플레이페어는 아닐 거라 생각하며 명판을 찾는다. 다행히 조지 메이클 켐프George Meikle Kemp라는 작가다. 그는 독학으로 건축을 배운 무명의 건축가였다. 1838년 정부 디자인 공모에 당선되었고, 1846년에 탑을 완성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에서 100만 광년은 떨어진 독특한 스콧 기념탑은 새로운 에딘버러를 바라는 집념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금 고갈로 모든 건축 사업이 중단된 1829년 이후, 10여년 동안 절치부심한 반성의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하루가 저물고 있다. 스콧의 최초 작품인 <웨이벌리>는 꼭 한번 읽겠다 다짐하며 숙소로 걸음을 옮긴다. 오래된 고층빌딩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을 따라 얕은 언덕을 넘는다. 언덕 아래 세인트 앤드류 광장이 북적거리고 있다. 천막이 광장을 덮었다. 천막 안이 궁금한 우리는 천막 안을 구경한다. 와인과 음식을 즐기거나 즐기려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흥겨운 사람들에 나도 흥이 돋는다.
광장 가운데 선다. 스콧 기념탑보다 높은 기념탑에 또 한번 고개를 젖힌다. 얇고 길다란 기둥 꼭대기에 한사람이 외롭게 서 있다. 헨리 던다스Henry Dundas라는 인물이다. 1807년 영국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주장한 노예무역 폐지에 공감대는 있었지만, 정책적인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보라). 당시 스코틀랜드 내무장관이던 던다스가 점진적 폐지안이라는 중재안을 제안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서 노예무역 폐지 정책은 급물살을 탄다. 던다스 기념탑은 좋은 정치가 존중받는 좋은 사회의 증거처럼 보인다.
이번에는 강렬한 붉은색 건물이 호기심을 끈다. 처음보는 낯선 건물은 국립 초상화 미술관Scottish National Portrait Gallery이다. 영국 사람들의 초상화 사랑은 유별나다. 절대왕정이 확립되던 16세기에 전문적으로 그려진 이래로, 바로크 시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프라이버시의 탄생과 함께 일반 대중들까지 초상화 그리기에 동참한다. 내가 사는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요크에도 제법 큰 초상화 미술관이 있을 정도다.
숙소로 가는 길은 심심할 틈이 없다. 스탠딩 코미디 클럽The Stand Comedy Club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어린 카우보이가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겨누며 해맑게 웃고 있다. 머리 위로 카피(comedy at the heart of the fringe)가 따라붙었고, 오후 1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공연 타임테이블이 아래에 빼곡히 그려져 있다. 과연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어디까지가 프린지(주변)인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