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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3. 성과 궁전 사이 로열 마일이 있다

1. 

칼튼 힐을 올랐던 얕은 계단을 내려간다. 여행 첫날을 마무리하기엔 8월의 에딘버러는 해가 길다. 내일 개막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로열 마일Royal Mile을 향한다. 그 전에 도로 건너편 높고 긴 장벽이 호기심을 끈다. 칼튼 힐로 갈 때는 보지 못했었다. 로열 마일은 금새 잊고 장벽 안을 확인하러 길을 건넌다. 뜻밖에도 칼튼 공동묘지Old Calton Cemetery다. 도심 한 복판에서 만난 희귀한 공간이다.


묘지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독특한 원통형 무덤은 데이비드 흄의 것이다. 삼촌의 기념탑을 만든 조카, 존 플레이페어도 여기 묻혔다. 넬슨 기념탑을 건축한 로버트 번Robert Burn 무덤도 발견한다. 타임볼이 잘 보이는 곳에 용케 자리를 잡았다. 마치 숨겨놓은 보물을 찾듯 공동묘지를 즐겁게 돌아다닌다. 


오벨리스크를 닮은 멋진 탑도 인상적이다. The Friends of the People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한다고 적혀 있다. ‘민중의 친구들’은 참정권을 요구한 최초의 운동으로, 무려 1793년에 발생했다. 탑을 세운 토마스 해밀톤Thomas Hamilton은 오벨리스크 바로 뒤에 묻혀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동묘지 투어다. 순간 링컨 조각상을 발견하고 살짝 당황한다. 스코틀랜드, 그것도 공동묘지에서 링컨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리석 재단 위에 청동으로 만든 링컨이 서 있다. 노예로 보이는 청동 조각들이 링컨의 발치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1700년대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미국으로 대규모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 정착한 그들은 남북전쟁에서 링컨 연합군을 위해 싸웠다. 이 기념탑은 남북전쟁에서 희생된 Scottish-American을 기리며 1893년에 세워졌다. 미국 밖에 있는 유일한 남북전쟁 기념비고, 최초로 국경 밖에 세워진 미국 대통령 동상이라고 한다. 난해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To preserve the jewel of liberty in the framework of Freedom. 대충 의미는 알겠는데 정확히 해석은 안된다.


2.

큰 길을 따라 로열 마일로 간다. 멋진 청동 기사상이 멋을 더하는 국가기록원National Records 건물이 멀리 보인다. 하늘로 앞 발을 치켜든 말 위에서 기사는 근엄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기사 머리 쪽이 코미디다. 주황색 콘이 씌워져 있다. 공사장에서 흔히 보는 바로 그것이다. 굳이 저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가 콘을 씌운 누군가가 궁금하다. 콘 위에 비둘기 한 마리가 늠름하게 앉았다. 


기사가 바라본 시선에 노스 브리지North Bridge가 있다.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를 본다. 보통 다리 밑은 강물이 흐르지만, 노스 브리지 아래는 철도가 흐른다. 역이 다리 아래에 있다. 에딘버러에 처음 철도가 개통된 것은 1846년이다. 당시는 노스 브리지North Bridge 역이던 이름이 웨이벌리Waverley로 바뀐 것은 1854년경이다. 스코틀랜드 대문호 월터 스콧Walter Scott이 익명으로 출판한 최초의 소설 <WAVERLEY>(1814)에서 따왔다. 웨이벌리 역사는 자체가 거대한 유적지다. 


노스 브리지를 건너 조금만 길을 오르면 로열 마일이다. 로열 마일은 에딘버러 성에서 훌리루드Holyrood 궁전에 이르는 거리 이름이다. 거리 측정 단위인 1마일이 로열 마일에서 파생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 구글 지도로 성과 궁전의 거리를 측정하면 정확하게 1마일이 찍힌다. 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다른 주장도 있다.


고대 로마 군대는 식민지를 개척할 때, 천 걸음마다 나무 막대를 꽂았다. 라틴어로 천 걸음은 mille passua, 1000을 뜻하던 mille에서 ‘l’ 하나가 탈락하면서 mile이 되었다. 당시 로마인의 한 걸음은 약 1.48미터가 표준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1마일은 1.48킬로미터다. 하지만 지금 영미권에서 쓰는 1마일은 1.609킬로미터다. 고대 로마 군인들 보폭보다 영국인들 보폭이 조금 컸던 모양이다. 


로열 마일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01년이다. 길버트M.W.Gilbert라는 작가가 19세기 에딘버러를 묘사하는 글에서 ‘성과 궁전 사이에 로열 마일이 있다’고 쓰면서 처음 언급되었다. 그리고 1920년에 출판한 에딘버러 가이드북 타이틀로 ‘로열 마일’을 선정하면서 대중적으로 로열 마일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3.

이미 로열 마일은 바리케이트를 세워 사람들 왕래만 허용하고 있다. Virgin Money 로고를 새긴 아치 구조물을 지나 로열 마일로 들어선다. 거리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 쇼케이스를 하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즐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로열 마일을 점령하고 있다. 


졸라맨 복장을 한 퍼포머들이 아내에게 인사를 건넨다. 의상 컬러에 맞춰 얼굴까지 파랑, 빨강, 노랑, 초록색을 칠했다. 북유럽 향취를 풍기는 젊은 여성 퍼포머는 가죽 끈으로 잠금 장치까지 한 채로 쇠사슬을 풀고 있다. 덤블도어 코스튬을 하고 공중부양 중인 퍼포머도 보인다. 


이런 난장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장구와 북을 치며 상모를 돌리는 우리나라 공연단이다. 준하준서가 달려가 반색하자 홍보하던 일도 멈추고 반갑게 인사한다. 동양인은 눈 씻고 봐도 없는 곳에서 만난 탓인지 그녀들도 우리만큼 기뻐한다. 드럼통과 냄비만 놓고 연주하는 미국 청년이 있고, 바이올린과 기타로 멋진 음악을 만드는 젊은 커플도 있다. 스코틀랜드 고등 법원 입구에는 백파이프 연주자가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에딘버러 성을 오르는 언덕이다. 언덕은 통제되고 있다. 군악대 연주 소리가 성벽을 넘어 흘러나온다. 아마도 프린지가 자랑하는 밀리터리 타투Military Tattoo 리허설이 한창인 모양이다. 전세계에서 온 군악대를 태운 관광버스들이 분주하게 드나든다. 밀리터리 타투도 처음에는 축제의 부대행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입장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1억명이 넘는 TV 시청 인구가 군악대들이 연출하는 한편의 드라마를 매년 시청한다. 


4.

성으로 가는 사거리 언덕에서 로열 마일 명판을 확인한다. 작고 예쁜 집 벽면에 박힌 명판 아래로 로열 마일 카페가 적힌 더 작은 간판이 귀엽다. 카페를 끼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은 또다른 세상이다. 소란이 고요로 둔갑한다. 골목은 램지Ramsay라는 이름을 가졌다. 17세기 시인의 이름이 골목 이름이 되었다. 오래되고 작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골목 끝이 넓은 길로 이어진다. 에딘버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람한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이 우리를 맞는다. 각종 공연팀 포스터가 건물 앞에 빼곡하다. 합판으로 얼기설기 세운 알림판은 대학생 동아리 수준으로 어설프다. 그래도 정겹다. LENNON 포스터에 눈길이 꽂힌다. 흰 배경에 존 레논 얼굴을 파란 물감으로 스케치한 심플한 포스터다. through a glass onion이란 가제가 붙었다. 비틀즈 11집, The Beatles(1968)에는 Glass Onion이란 곡이 있기는 하다. 의미는 당최 모르겠다.  


어셈블리 홀 입구는 수도원 입구를 닮았다. 문 위 새겨진 1846이 건물 나이를 짐작케 한다. 이것도 플레이페어가 만들었다. 피식 웃음이 난다. 어셈블리 홀은 새로운 신학 대학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며 여러 용도로 쓰였다. 홀 중간에 하늘이 열린 공간을 발견한다. 내일 공연 타임테이블이 작은 칠판에 분필로 빼곡하게 적혀 있다. 11시부터 22시 30분에 시작하는 공연까지 꼼꼼히도 적어 놓았다. 3주간 매일 바뀌는 타임테이블을 매일 새롭게 적어 낼 누군가의 집념이 느껴진다. 


커다란 동상이 서 있다. 왼손은 성서를 안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하늘이 뚫린 까닭에 세월의 풍상을 제대로 겪었다. 위는 붉고 아래는 검은 빛이다. 시간이 만든 절묘한 그라데이션을 입은 동상은 존 녹스John Knox(1514~1572)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상징적인 인물이다. 



(청교도주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고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제도를 안착시킨 인물이다. 장로나 권사같이 교인들 권리를 위임받은 교직자들이 교회 일을 처리하는 제도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 교회 운영 방식을 기초한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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