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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Apr 04. 2021

중세를 걷다

캠브리지 1

1.

나는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다. 소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의미하는 버킷리스트는 목에 밧줄을 매고 양동이를 차 버린다는 kick the bucket에서 유래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의 뜻과는 달리 사람들은 로맨틱한 의미로 쓴다.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오래 간직했던 소망을 영국에서의 첫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루기로 결심한다.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하며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은 즐거웠다. 파리 뿐 아니라 파리 근교에 있는 모네의 지베르니와 고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둘러보는 일주일의 여행 계획이 거의 완성되던 찰나였다. 그런데 왠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크 인근의 리즈 공항에서 파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전체 일정이 그랬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여행 후에도 아이들의 겨울방학은 여전히 길게 남아 있었다. 


크리스마스 여행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돌입한다.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연말을 런던에서 보내는 것으로 수정한다. 여행 방식도 완전히 바꾼다.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 여행을 택한다. 여객선으로 도버 해협을 건널 작정이다. 자동차를 배에 싣고 해협을 건너 프랑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블록버스터급 여행이다. 반도 국가 출신의 국민인 나로서는 대단한 도전이다. 


아침 8시를 조금 넘겨 집을 나선다. 아직 한밤중이다. 영국의 겨울은 밤이 길고 낮이 짧다. 아니 그냥 길다는 표현은 한참 부족하다. 아침을 당겨서 쓰지 않으면 하루가 금세 가버린다. 게다가 도버Dover 항까지는 요크에서 46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부산보다도 멀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사실 요크 근처에도 프랑스 칼레Calais로 가는 페리가 있는 헐Hull 항구가 있다. 그럼에도 머나먼 도버를 출발지로 택한 것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잉글랜드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역사도시 도버를 가볼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런던으로 이어지는 A1 고속도로에 차를 올린다. 고속도로라기엔 도로 상태가 그저 그렇다. 그래도 리버풀 여행에서 경험했던 M62 고속도로보다는 훌륭하다. 그때처럼 우리나라의 국도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동차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영국의 동남쪽으로 신나게 내달린다. 동카스터Doncaster를 지날 즈음에서야 여명이 밝아온다. 


도버까지의 긴 여정에는 쉼표가 필요하다. 예정대로 요크와 도버 중간쯤에 있는 캠브리지Cambridge를 들른다. 고속도로 통행료가 무료인 영국의 고속도로에는 톨게이트 같은 것도 없다. 영국의 여느 시골 마을과 똑같은 풍경 속을 한동안 달린다. 이제는 13세기에 세워진 대학 건축물들의 모습이 풍경 속에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도 그럴 조짐이 전혀 없다. 톰톰(영국의 대표 내비게이션 브랜드)에 입력한 캠브리지라는 지시어를 킹스칼리지King’s College로 구체화시켜 다시 입력한다. 금세 킹스칼리지의 멋진 외관이 시야에 잡힌다. 


그런데 아직도 뭔가가 불안하다. 드넓은 목초지에 건축물 하나만 생뚱맞게 서 있다. 내가 아는 캠브리지는 캠Cam 강 양쪽으로 트리니티, 킹스, 퀸즈 칼리지 같은 역사적인 대학들을 거느린 타운이다. 타운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톰톰이 알려준 킹스칼리지 입구에 차를 세운다. 호텔 컨시어지처럼 차려입은 멋진 노신사에게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한다. 톰톰이 우리를 데려온 곳은 킹스칼리지의 후문이다. 다시 차를 몰아 정문이 있는 타운을 향한다.   


King's College


타운 초입에 보이는 캠 강 규모에 살짝 놀란다. 작은 샛강 크기다. 강 건너 아득한 중세 분위기의 타운이 시작되고 있다. 가까운 주차장에 비싼 주차비를 내고 시간을 아낀다. 캠브리지의 칼리지 구경을 시작도 하기 전에 세인트존스St Johns 거리에서 걸음을 멈춘다. 독특한 교회 건물 때문이다. 둥근 외벽에 고깔 지붕을 씌워 놓았다. 이름도 원형 교회the Round Church다.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부활의 교회the Church of the Resurrection를 본떠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부활의 교회는 예수가 매장되었다가 부활한 곳에 세워진 교회다. 


중세 교회의 전형인 고딕 양식이 자리잡기 이전에는 이런 둥근 형태가 일반적인 교회의 건축 양식이었던 모양이다. 원형 교회는 무려 1130년에 세워졌다. 대학가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 캠브리지를 지켜온 대표 건축물인 셈이다. 교회 이름 옆에 붙어 있는 ‘캠브리지는 여기서 시작된다Cambridge begins here’는 슬로건 같은 문구가 흥미롭다. 교회 내부에는 중세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와 15세기에 나무로 조각된 천사상, 빅토리아 시대의 타일 장식 같은 시대의 상징물이 가득하다고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밥이다. 문화적, 정서적 양식은 잠시 미루고 식당을 찾아 걸음을 재촉한다.  


세인트존스 거리는 캠브리지 칼리지들의 박물관이다. 시인 워즈워즈를 배출한 세인트존스칼리지St John’s College를 시작으로 뉴턴이 학생으로 또 교수로 재직했다는 트리니티칼리지Trinity College, 헨리 8세가 설립한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그리고 헨리 6세의 왕비가 설립하고 에드워드 4세의 왕비가 완성했다는 퀸즈칼리지Queen’s College가 일렬로 서서 관광객들을 맞는다. 시간을 잊은 공간 속을 촌스럽게 두리번거리며 여행한다. 


세인트존스와 트리니티 칼리지를 빠져나가면 중세의 골목길 같던 길은 몇 배나 넓어진다. 캠브리지를 한눈에 보기에 가장 좋다는 성 메리 교회 Great St Mary’s Church 너머에 화려한 킹스칼리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첨탑과 벽면을 수놓은 예술적인 장식이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다. 담장마저도 예술적 디테일의 끝을 보여준다. 돌 하나하나에 장인의 솜씨가 깃들었다. 거의 100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는 중세 건축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끌어낸다.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 같다. 


The Eagle Pub


킹스칼리지 끝에서 왼쪽 작은 골목으로 몸을 돌린다. 머리가 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먹이를 포획하는 찰나의 순간을 멋지게 포착한 펍의 간판을 발견한다. 우리의 허기를 해소해 줄 이글 펍The Eagle이 분명하다. 펍 입구는 맥주를 뽑는 수십 종의 탭Tab들이 장악하고 있다. 밝은 입구를 지나면 고색창연한 식당 공간이 시작된다. 식당은 미로처럼 복잡하다. 장사 잘되는 집들이 그렇듯 주변의 가게나 집들을 여럿 사들여 확장한 모양이다. 


각각의 방들은 제각각 다른 분위기를 뽐낸다. 세월이 묻어나는 식탁과 의자가 펍의 묵직한 분위기와 어우러진다. 벽체도 몇 번이나 보수공사를 한 것이 틀림없다. 하얗고 붉은 컬러가 불규칙하게 섞여 있다. 씩씩하고 상냥한 매니저가 벽난로 앞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즐거운 가족 식사로는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단, 식탁에서 발견한 조잡한 케이스에 담긴 초 장식은 빼고 싶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와플 세트를 추천한다. 우리는 햄버거와 스테이크 그리고 샐러드를 추가로 주문한다.  


이글 펍은 그냥 단순한 펍이 아니다. 생명의 비밀에 관한 어마어마한 발견을 발표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가 굳이 멀리서 이곳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는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 과학자들의 단골 펍이었다. DNA를 연구하던 크릭Francis Crick과 왓슨James Watson도 여러 단골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에게 이글 펍은 에일을 마시며 토론하고 휴식하고 다시 논쟁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오랜 연구 끝에 두 사람은 유전자가 어떻게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지 알아낸다. 


1953년 2월 28일, 생명의 비밀에 관한 단초를 제공하는 그 유명한 DNA 이중나선 모델에 관한 이론이 이곳 이글 펍에서 최초로 발표되었다. 펍은 파란 명판plaque을 문 옆에 걸어 놓고 그날의 영광을 기록해 놓았다. 명판에는 ‘DNA Double Helix 1953’이라는 헤드라인 아래에 생명의 비밀The secret of life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풀어놓았다. 이런 대단한 발견을 이런 곳에서 발표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캠브리지는 노벨상 수상자를 유독 많이 배출했다. 100명이 넘는다.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앨런 튜링, 존 메이너스 케인스, 버트런트 러셀, 스티브 호킹 등 이름 만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단한 인물들이 캠브리지 출신들이다. 캐번디시 연구소도 노벨상과 인연이 깊다. 1962년에는 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동시에 배출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좁은 지역에서 이렇게 전 지구적인 인물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다. 


이글 펍의 역사는 152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의 대표 메뉴인 와플파이는 수많은 인물들도 맛봤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공통분모가 생겼다. 이글 펍의 와플파이 동창이 된 것이다. 이렇게라도 엮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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