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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Apr 08. 2021

조용히 아침을 맞는다는 것

런던 1

4.

파리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는 그야말로 스펙터클 했다. 시작부터 그랬다. 작은 소망이었던 파리에서의 멋진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제법 괜찮은 Novotel Paris Tour Eiffel을 숙소로 잡았다. 그런데 체크인을 하려니 2인 객실이 배정되어 있다. 가족이 넷인데 더블침대 하나가 전부인 방이다. 프런트에서 한바탕 결전을 치른다. 4인실을 어렵게 받아내고 방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호텔 외벽에 갇힌 후미진 방이다. 결전의 과실 치고는 너무 형편없다. 다시 프런트로 내려가 2라운드를 벌인다. 마침내 파리에서의 멋진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예약했던 방을 다시 쟁취해 낸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좋은 방이었다. 20층 객실에서 바라본 파리는 아름다웠다. 센 강과 RadioFrance가 창밖 바로 아래에 있고 에펠탑은 지척이었다.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에는 비가 내렸다. 샹젤리제와 거리 곳곳의 크리스마스 상점들이 뿜어내는 시즌의 화려함도 비에 젖었다. 거센 비를 맞으며 무리하게 센 강 유람선을 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불킥 감이다. 체력도 흥미도 반감된 결정적 장면이었다. 그래도 모네의 집과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 루앙 대성당, 고흐가 말년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여행은 즐거웠다.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 여행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사건은 차가 견인된 일이었다. 호텔 앞에 잠시 주차해둔 차가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영국으로 돌아가기 바로 전날 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가 보관된 장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창문도 없는 투박한 콘크리트 건물 지하에서 수속을 밟았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감옥 같은 공간의 구조 자체가 공포를 느낄 만큼 위압적이었다. 벌금을 내고 열쇠를 돌려받고 차에 앉아 시동을 켜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쪼그라들었는지 모른다. 


호텔에서 칼레 항으로 가는 길에는 시청사도 잠시 들렀다.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에 몇 없는 로댕의 진품이고 칼레 시청사 앞에서 그 작품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주했던 아침 탓에 스치듯 감상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를 프랑스로 데려왔던 똑같은 P&Q Ferries를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너며 파리의 크리스마스 여행은 끝을 맺었다. 고백컨데, 내가 소망하던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화이트 클리프가 보인다. 도버의 하얀 절벽이 푸른 바다와 대비되며 신기한 컬러를 뿜어 낸다. 맑은 영국의 차가운 하늘이 반갑다. 그래도 집이 있는 영국이 지금은 우리나라다. 이런 낯선 안도감에 실소가 터진다. 런던으로 가는 대낮의 A20 도로는 그날 밤 같지 않다. 여전히 반대편 차들은 아슬아슬 쌩하며 지나가지만, 그날 밤처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은 아니다. 부지런히 런던의 숙소를 향해 달린다. 


연말 런던에서의 3일을 지낼 숙소는 워런하우스Warren House다. 인터넷으로 숙소를 찾다가 런던의 숙소 중에 숨은 보석Hidden Gem이라는 홍보 문구에 끌려 과감하게 예약했었다. 내가 과감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제법 가격대가 높았기 때문이다. 워런하우스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위치가 매력적이었다. 숙소 왼쪽에는 다양한 종의 사슴들이 야생으로 서식한다는 리치먼드 공원Richmond Park이 있고, 오른쪽에는 세계 최고의 테니스 대회로 유명한 윔블던Wimbledon이 있다. 또 하나, 영국에서 가장 큰 한인 타운인 뉴몰든New Malden이 가깝다. 구글 지도에서 세 곳의 꼭짓점을 연결하면, 거의 그 중심에 워런하우스가 있다.


톰톰이 가리키는 골목으로 핸들을 튼다. 한 겨울임에도 잘 관리된 정원 뒤로 2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딘 워런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저택은 세월에도 화려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숙소 안은 훨씬 더 빅토리아 시대다. 가구와 벽지, 눈에 보이는 모든 인테리어들이 정갈하고 고급스럽다. 푸른색 유니폼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원 앞에 선다. 친절하지만 똑 부러진 응대가 마음에 든다. 군더더기가 없다. 필요한 것만 정확하게 묻고 질문의 의도에 맞춰 명확하게 답하는 깔끔한 성격의 사람이다. 


친절하고 깔끔한 또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방으로 안내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좁은 복도를 따라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가는 모양이 재밌다. 방은 호텔 객실이라기보다는 부유한 가정집의 안방같이 아늑하다. 모던함이 넘치던 파리의 노보텔에서 클래식함의 끝판왕 같은 런던의 워런하우스로 넘어온 것이 한나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다. 몸이 침대 속으로 폭하고 빠진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푹신함이다. 바다를 건너느라 지친 몸과 마음이 저절로 치유받는 기분이다. 방 한쪽 구석에선 풍선 두 개가 둥둥 떠다닌다. 아이들이 파리의 호텔에서 선물 받은 풍선을 기어이 이곳 런던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대단한 집념이다.


Warren House


조용히 아침을 맞는 상쾌함이란, 그리고 고단함을 단박에 씻어주는 꿀잠이란 이런 것이다. 좋은 잠으로 몸과 마음을 말끔히 치유받은 아침, 콧노래가 절로 난다. 좁은 복도를 거슬러 식당을 향한다. 햇살이 가득한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세팅된 식탁은 마치 고급 레스토랑의 그것 같다. 식당 안을 둘러보다가 동양인은 우리뿐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아니, 이방인은 우리뿐이다. 홈페이지에 다시 들어가서 앵글로색슨 외에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싶을 정도다. 


아침 식사는 완벽하다. 여태 먹어본 어떤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보다도 훌륭하다. 구성이 달라진 것은 없다. 식사를 마치고 워런하우스를 둘러본다. 차를 마시는 공간, 책을 읽는 공간, 담소를 나누는 공간들이 서로 구분되어 있다. 각 공간들을 대비시키는 차별화된 인테리어가 공간에 재미를 더한다. 벽지와 의자뿐 아니라 카펫까지도 컬러와 질감이 다르다. 담소를 나누는 공간에 앉아 브로셔를 읽는다. 워런하우스가 프라이빗한 결혼식장으로 인기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건물만큼 멋진 큰 정원을 가진 이유를 알겠다. 한 겨울에도 사람의 손길이 매일 닿은 듯 정갈한 까닭도 납득이 된다.


아침 산책을 나선다. 골목길을 내려와 길 하나를 건넌다. 곧바로 리치먼드 공원이다. 큰길의 차도가 공원으로 꺾여 들어가는 모양이 신기하다. 공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다. 런던 왕실 공원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공원이다. 런던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자주 들른다는 하이드 파크와 켄싱턴 가든을 합한 면적의 4배에 달한다. 영국에서 파크Park는 왕이나 귀족의 사냥터로 구획된 지역을 의미한다. 지금은 야생 사슴과 공생하는 공원으로 유명하지만, 왕실의 사냥터로 쓰이던 그 옛날에는 수많은 동식물들의 보고였을 것이다. 


그런데 공원을 한창 거니는데도 사슴이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종의 사슴들이 떼 지어 서식한다는 소개글이 무색하다. 가끔 한두 마리가 숲 속 깊은 곳에서 종종 목격되는 것이 전부다. 사슴과 자유롭게 뛰노는 흔치 않은 경험을 아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무심한 겨울바람만 휑한 사냥터를 쓸고 지나간다. 말을 타고 공원을 산책하는 몇몇 사람 말고, 자동차로 공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 말고, 그 바람을 걸어서 맞는 사람은 거의 우리뿐이다. 걸을수록 돌아갈 길이 멀어진다는 생각에 얼른 발걸음을 돌린다.


오후에는 뉴몰든을 찾는다. 아내의 오랜 민원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에 한국을 떠나온 이후로 아내는 한 번도 미장원을 찾지 못했다. 파마는 풀리고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거슬렸지만, 아내는 오늘을 기다리며 묵묵히 참았다. 영국 미용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바비 인형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익숙한 영국 미용사들에게 한국 여성의 머리카락은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들은 아랍계 이발사가 있는 이발소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미용실은 그 마저도 잘 없기도 하다. 


뉴몰든에는 1만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전체 뉴몰든 인구의 10%나 된다고 한다. 영국 상점들 사이로 10%는 훨씬 넘어 보이는 한국 가게들이 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몇 개월 만에 보는 한글 간판이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다. 반가운 간판들 중에서 진고개를 찾는다. 뉴몰든에서는 진고개 갈비탕이 진리라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었었다. 워런하우스에서의 멋진 아침 식사 후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갈비탕과 몇 가지 한국 음식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는다. 아내는 식사를 마치고는 튕기듯 일어나 한인 미용실로 가버린다. 나와 아이들은 재차 뉴몰든 구경을 시작한다. 뉴몰든의 인상은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번화가를 닮았다. 사이즈가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한글 간판이 붙은 가게들을 옮겨가며 들른다. 한국말로 쇼핑하는 재미에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오해받을 걱정 없이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대화에 내가 힐링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중고생으로 보이는 한국 아이들과 영국 아이들이 뉴몰든 거리를 뒤엉켜 지나간다.  


뉴몰든 거리 끝에서 대형 한인마트를 발견한다. 마트 안은 별천지다. 여기가 한국인지 영국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요크에는 딱히 한인마트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중국인 마트에서 우리나라 제품을 곁다리로 파는 정도다. 전화로 주문하고 집으로 물건을 배달해주는 곳이 있긴 하다. 하지만 상품도 제한적이고 요크와 리즈를 커버하느라 며칠을 기다리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뉴몰든의 마트에는 없는 것이 없다. 감자탕 재료와 소뼈도 판다. 요크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차에 한가득 싣는다. 한겨울이라 음식이 잘못될 염려도 없다. 


워런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를 태운다. 차 안 가득 파마 약품 향이 퍼진다. 나는 이마저도 그리웠던 모양이다. 한국의 향수가 물밀듯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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