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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Apr 06. 2021

시간을 먹는 시계

캠브리지 2

2.

본격적인 캠브리지 탐방을 시작한다. 킹스칼리지에서 이글 펍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작은 명판 하나가 반짝인다. 허기를 채웠더니 아까는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있던 자리다. 서점은 1538년에 처음 세워졌다. 최초의 출판사인 캠브리지 대학 출판사가 출판한 최초의 서적이 팔렸던 곳이다. 


삼거리 다른 모퉁이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중세풍의 건축물 외벽에 현대적인 예술 작품 하나가 생뚱맞게 들어가 있다. 얼핏, 황금방패 같은 것 위에 황금메뚜기 같은 것이 올라타고 있는 형상이다. 아래에는 외계어나 다름없는 라틴어 같은 것을 새겨놓았다. 이번에는 정보를 주는 명판이 없다. 이런 때는 구글이 답이다. 작품명이 The Corpus Chronophage Clock이란 사실을 금세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시계 같기도 하다. Chronos는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다. 그리고 phago는 '먹는다'는 동사다. 작품은 ‘시간을 먹는 시계’라는 어마어마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The Corpus Chronophage Clock


시간을 먹는 시계는 존 테일러John C. Taylor의 작품이다. 그는 영국에서는 제법 유명한 발명가라고 한다. 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공부했다는 구글 정보가 관심을 끈다. 작품이 있는 중세풍의 건축물이 코푸스Corpus 대학의 부속 건물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솜씨가 대단한 작품이다. 황금방패를 올라타고 있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괴물은 방패 가장자리에 있는 톱니를 쉼 없이 돌리고 있다. 앞발로 당기고 뒷발로 민다. 입을 쩍 벌리고, 눈도 깜빡인다. 머리와 꼬리는 앞발과 뒷발의 움직임을 따라 들쭉날쭉한다. 이러다가 1분의 마지막 1초, 그러니까 60번째인 마지막 1초는 괴물이 먹어치운다. 그때는 뭔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소리도 낸다. 


2008년 작품 제막식에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초대되었다는 뜬금없는 헤드라인의 신문기사를 발견한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한다. "호수 위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 위로 동그란 파문이 인다. (내가 황금방패라고 말했던) 시계 표면에 있는 파문은 빅뱅 이후 우주의 중심에서 팽창하는 시간을 묘사한 것이다". 그제야 전혀 납득되지 않던 헤드라인이 이해된다. 아인슈타인 이래로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중력이 무거울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를 정리한 책이 스티브 호킹의 <시간의 역사>다. 


구글 정보로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작품은 점점 더 난해해진다. 정교한 기계적 메커니즘 자체가 예술적이라는 인상비평 수준에서 멈추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래도 시계 아래에 적힌 라틴어의 의미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구글을 검색한다. 라틴어는 성서 요한일서의 2장 17절 말씀이다. 영어로 바꾸면, The world passes away, and the lust of it. 한글로 번역하면, 세상도 그것의 욕망도 다 지나간다는 그런 말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한 유일한 것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똑같은 시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길지 않은가?


삼거리에서 퀸즈칼리지를 향해 가볍게 산책을 이어간다. 차갑게 맑은 12월의 하늘이 유서 깊은 캠브리지와 묘하게 어울린다. 중세의 석조 건축물 앞은 호텔 컨시어지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수위 아저씨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칼리지 저마다의 상징을 담은 복장이 예사롭지 않다. 칼리지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당당하게 자신을 증명하고 칼리지 속으로 사라지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던지, 아내와 나는 그 광경을 한참 쳐다본다. 해맑은 두 아들의 얼굴도 번갈아 보게 된다.


준서가 앞서 뛰어나간다. 그러더니 어떤 건물 속으로 사라진다. 관광객들에게 교내 일부를 개방하는 칼리지 건물이다. 시간을 먹는 시계의 작가가 졸업한 코푸스 크리스티 칼리지다. 육중한 출입문을 지난다. 정갈한 잔디밭 뒤로 잘 생긴 건축물이 반듯하게 서 있다. 건물과 이어진 우아한 회랑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한다. 잔디밭 라인이 건물 안으로 관광객들이 더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작고 좁은 골목길이 우리를 부른다. 골목길은 작은 하늘만 열어 놓고, 중세의 시간에 우리를 가둔다. 캠브리지 뒷골목의 근사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마음에 평온을 안겨준다. 천천히 그 평온함을 만끽한다. 다시 큰길이다. 큰길에서 방금 지나온 골목길의 이름을 확인한다. 무려 여왕의 길Queen’ Ln이다.


Mathematical Bridge


큰길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리 위다. 아마도 퀸즈칼리지 안에 있다는 수학의 다리Mathematical Bridge를 구경하는 구경꾼들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은 저렇게 캠퍼스 밖에서 캠퍼스 안의 다리를 볼 수밖에 없다. 


수학의 다리는 캠 강이 갈라놓은 퀸즈칼리지의 두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다. 정교한 수학적 계산식을 통해 볼트나 너트 같은 별다른 장치 없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튼튼하고 아름답다. 사람들을 불러 모을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작 뉴턴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져 캠브리지의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다르다. 


수학의 다리는 뉴턴이 만든 다리가 아니다. 윌리엄 에써러지가 설계하고, 제임스 에섹스가 건축했다. 수학의 다리가 만들어진 1749년은 뉴턴 사후 22년이 지난해다. 탁한 강물 위로 무채색의 다리가 공중에 떠있는 광경을 본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키 큰 나무 아래에 겹겹이 나무를 쌓아 만든 아치형의 다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모든 풍경이 한 몸처럼 어우러진 모습이다.

 

캠 강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다리가 있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있다는 탄식의 다리다. 베네치아에 있는 탄식의 다리를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두 건물을 연결한다는 것, 아치형의 다리라는 것 외에 별로 닮았다고 할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베네치아의 그것은 투박하고 사방이 막힌 반면, 캠브리지의 그것은 날렵하고 열린 다리다. 탄식이라는 같은 키워드가 만들어낸 오해가 분명하다. 


베네치아의 것은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연결한다. 궁전 내에 있던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들은 이 다리를 건너 수형 생활을 시작한다. 죄수들은 다리 위에 난 작은 창으로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는 이 풍경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탄식했다고 한다. 지난 베네치아 여행에서 탄식했다는 그 죄수가 카사노바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캠브리지에 있는 탄식의 다리에 관한 이야기는 캠브리지를 졸업하고 지금은 요크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에게 들었다. 캠브리지는 예전 수도원에서 전승된 튜토리얼Tutorial이라는 교습 방법으로 학생들과 수업한다. 교수와 1대 1 또는 1대 3으로 수업하는 개인교습 방식이다. 튜토리얼 수업은 전공에 대한 깊고 풍부한 학습과 이해를 돕는 반면, 부작용도 심하다고 한다. 수업 날이 다가오면 불면의 밤이 길어지고 식욕이 사라지며 손떨림을 호소하게 되고,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는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캠브리지에 왔나’라는 긴 탄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12월에도 캠브리지 여행의 꽃이라 불리는 펀팅Punting 투어가 한창이다. 십여 명을 태운 길쭉한 배들이 다리 아래를 지난다. 긴 막대기로 강바닥을 찍어 밀어서 배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위를 펀팅이라고 한다. 캠브리지에서 펀팅 투어가 유명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도 캠 강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칼리지들을 훔쳐보는 재미 때문이다. 또 펀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캠브리지라는 이름을 이해하게 된다. 캠브리지는 캠Cam 강과 다리Bridge의 합성어다. 수학과 탄식의 다리 외에도 캠 강에는 수많은 다리들이 있다. 캠 강의 다리는 곧 도시의 정체성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캠브리지 여행의 꽃은 다음 여행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도버로 가는 길이 부담스러운 까닭이다. 수학의 다리와 탄식의 다리 아래를 흐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주차장을 찾아 캠브리지를 거슬러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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