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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Apr 07. 2021

도버의 겨울밤

도버

3.

캠브리지에서의 한나절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이글 펍에서 식사하고, 대학가를 산책하고, 몇몇 상점을 들른 것뿐인데도 예정했던 시간을 훨씬 넘겼다. 시간을 응축한 공간의 단단한 힘은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 만들어 놓은 까닭이다. 캠브리지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무엇하나 허트로 지나칠 수가 없다. 잠깐 훑어보겠다는 애초의 생각이 오만이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12월의 영국은 벌써 땅거미를 내리고 있다. 톰톰은 도버까지 2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알려 준다.


A1 고속도로를 이어 달린다. 런던 외곽도로London Orbital Motorway를 타고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4시를 넘어가면서 도로 주변은 이미 어둠에 휩싸였다. 멀리 퀸 엘리자베스 2세 다리가 보인다. 템즈Thames 강을 건넌다. 런던의 불빛이 까마득하다. 다리 아래는 나무들이 무성하다. 굴뚝을 탑재한 공장들이 듬성듬성 흐릿하게 보인다. 


외곽도로를 빠져나와 도버로 향하는 국도에 차를 올린다. 쾌적함이라고는 없는 영국의 도로 상태가 더 불쾌해진다. 도버로 가는 길은 승차감은 말할 것도 없고 빛도 잃어 캄캄하다. 마치 80년대 우리나라 지방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가로등도 거의 없다. 헤드라이트 불빛에만 의존해서 칠흑 같은 어둠을 달린다. 낯선 어둠은 새삼스레 차선의 방향을 인지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운전대의 좌우가 바뀐 영국에서의 운전에 제법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차선까지 좁고 중앙분리선도 불명확하게 그어져 있다. 가끔 지나는 반대편 차들은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눈과 어깨와 손과 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한 번씩 머리도 쭈뼛 선다. 배는 고프고 길은 보이지 않고 아내는 반대편 차들에 3초에 한 번씩 깜짝 놀라는 바람에 도버로 가는 길이 무슨 잔혹 활극처럼 되어가고 있다. 믿었던 톰톰도 오늘따라 오락가락하며 애간장을 태운다.


Premier Inn Dover


여행에서 계획은 계획일 뿐일 경우가 많다. 어둠 속에서 낯선 나라의 불편한 도로를 달리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숙소로 잡은 프리미어인 도버에 도착하니 8시가 다 되었다. 예상보다 2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도버는 이미 깊은 밤의 한가운데 있다. 날씨 좋은 날에는 프랑스 칼레도 보인다는 숙소 소개글에 끌려 예약한 숙소 앞은 지독한 어둠 탓에 저기가 바다인지 땅인지조차 분간이 어렵다. 


내륙의 요크와 달리 12월 도버는 바닷바람이 매섭다. 식사를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확신이 든다. 숙소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피시 앤 칩스, 스테이크, 햄버거 세트 그리고 샐러드와 음료를 주문한다. 보통 우리 가족의 식사량으로는 2인분 세트로 충분하다. 하지만 오늘 저녁은 3인분 세트가 필요한 날이다. 


처음에는 1인 1메뉴를 지키는 영국의 관습법을 따랐었다. 하지만 대식가인 영국인들의 식사량을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아내와 내가 함께 먹어도 피시 앤 칩스 하나를 먹어치우질 못했다. 돈도 돈이지만 버려지는 음식이 너무 많아지면서 요즘은 어딜 가도 적당량만 주문한다. 주문 말미에 sorry라고 덧붙이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영국의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 음료는 쏜살같이 나오고 음식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온다. 맛은 예상보다 훌륭하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내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한국에서도 차량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넌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바다라는 것이 국경을 건너는 일이다. 탑승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기고, 탑승 과정들을 시뮬레이션해본다. 페리는 7시 15분 출발이다. 탑승권에는 출발 한 시간 전까지 여객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출국 수속과 세관 심사도 밟아야 한다. 늦어도 새벽 5시 30분에는 숙소를 출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족들에게 내일의 일정을 간단하게 브리핑한다. 


그런데 준하의 낯빛이 심상찮다. 창백해진 얼굴이 식은땀까지 흘린다. 길고 힘든 하루를 보내고 급하게 먹은 저녁 식사에 탈이 난 모양이다. 호텔 프런트로 내려가 상비약을 찾는다. 그런 것은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시내 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부츠Boots가 있다는 말을 하고는 등을 돌려 나왔던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얼굴을 내밀더니 시간이 늦어서 문을 닫을 수도 있으니 얼른 가보라는 말을 보탠다. 직원의 무심한 태도가 야속하지만, 그걸 타박할 시간도 없다.


준하와 함께 약국을 찾아 나선다. 나는 체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걷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프리미어인 도버에서 한참을 걸어 나온 뒤에야 불빛을 만난다. 도버의 겨울밤이 아까보다 더 추워졌다. 아웃터만 입고 나온 준하가 몸을 떤다. 내 아웃터를 벗어 준하에게 입히고 부츠를 찾아 다시 걷는다. 거의 5분 만에 나타난 부츠의 간판에 불이 꺼져 있다. 절망할 틈도 없이 우리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또 걷는다. 다시 5분 정도만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조그만 상점을 발견한다. 비스듬한 간판 옆에 기적처럼 Pharmacy라는 글씨가 조그맣게 써져 있다. 


문 닫을 채비를 하던 여자 점원이 약 코너로 가서 자세를 잡는다. 우리가 약이 필요한 사람들이란 걸 단박에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소화제를 달라는데 자꾸만 감기약을 준다. 감기가 아니고 체했다고 하는데도 같은 약을 계속 들이민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하지만, 다른 약은 없다고 한다. 감기약을 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아내의 핀잔이 쏟아진다. 점원과 나눈 얘기를 충분히 했는데도 핀잔은 멈추지 않는다. 준하는 약을 먹고 잠에 들었다. 속이 진정된 덕분인지, 약에 취한 것인지, 힘든 하루가 피곤했던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결말인지 모르겠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깬다. 긴장이 잠을 쫓은 모양이다. 가족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 첫 경험에 바짝 긴장한 것이 사실이다. 숙소 앞에서 날카로운 바닷바람을 견딘다. 바다 내음을 담은 신선한 공기에 정신이 번뜩 든다. 도버에서 칼레까지는 뱃길로 33킬로 미터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거리가 50킬로미터 남짓이다. 어린 시절, 부산의 바닷가에서 대마도를 보던 기억을 떠올린다. 33 킬로미터면 훨씬 더 분명하게 보일 터다. 가족들을 깨우고 여객터미널로 떠날 채비를 마친다. 차에 오른다. 도버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어둠은 아직도 바다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어차피 도버에서 칼레는 보지 못할 운명이다.


Dover Port

여객터미널에서 선착장으로 가는 중간에서 출국 심사장을 통과한다. 모든 것은 차량 안에서 이뤄진다. 경찰에게 여권과 탑승권을 건넨다. 경찰은 운전자와 동승자의 얼굴을 여권과 꼼꼼히 맞춰 본다. 심사를 마친 차량이라는 확인증 같은 것을 받고, 룸미러 앞에 걸면 절차가 끝난다. 차를 몰아 선착장으로 향한다. 


우리가 타고 갈 P&O Ferries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층 아파트 몇 개 동을 모아놓은 어마어마한 크기에 깜짝 놀란다. 여객선에서 뿜어내는 환한 빛에 선착장의 어둠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여객선에 탑승할 화물차와 승용차들이 도착 순서대로 줄지어 선다. 긴 줄은 벌써 십 열을 넘겼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제목으로 친숙한 프랑스 뒹케르크Dunkirk로 가는 노선으로 차들이 몰려갈 때쯤, 도버 노선에 줄지어 서 있던 차들이 배에 오르기 시작한다. 처음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다.


여객선은 정시에 도버항을 출발한다. 뱃고동 소리를 듣으며 갑판으로 나간다. 도버 해안의 화이트 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옅은 빛을 튕겨내고 있다. 바다에서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하얀 절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프랑스 군대가 영국 해안에 이르러 화이트 클리프의 영험함에 움찔했다는 역사 속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도버 해협의 높은 파도에도 여객선은 끄떡도 없이 프랑스로 나아간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밀려온다. 어제의 피로까지 덩달아 쫓아온다. 객실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진다.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라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 겨를도 없는 깊은 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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